욘 포세의 소설 <샤이닝>에서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단지 나는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평소 지루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지루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한 어떤 일들도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무언가를 했을 뿐이다.
나는 차에 타 운전을 했고,
오른쪽 길과 왼쪽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지점에서
우회전을 했고, 다시
오른쪽과 왼쪽을 선택할 수 있는 다음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
죄회전을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그러다 바큇자국이 점점 깊이 파이는
숲길로 접어들어서야 어느 순간
차가 길바닥에 처박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계속해서 차를 몰고 있었고,
급기야 차는 완전히 멈춰버렸다.
후진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어 나는
차를 세웠다.
엔진을 꺼버렸다.
나는 차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앉아 있다,
문득
공허감이 나를 덮쳤다.
마치 지루함이
공허함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텅 빈 무의 세계.
욘 포세의 소설 <샤이닝> 초입부를 줄 바꿈 해서 시처럼 써보았다. 욘 포세의 소설은 독특했다. 마침표 없는 긴 소설을 썼다는 그가 이제는 단문과 마침표로 가득한 짧은 소설을 썼다.
문장은-문장의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노래 후렴구처럼 되풀이되고, 주선율이 끊임없이 변주되는 바흐의 곡처럼 반복되면서, 낯선 세계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독서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건, 이야기도 있지만 주로는 문장들이었다. 문장들에 낚여서 내가 무의지적으로 끌려들어 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시를 읽는 듯한, 혹은 노래를 듣는 듯한 착각을 했던 까닭은 마치 4분의 3박자나 8분의 6박자 같은 통일감 있는 속도로 단어와 마침표를 음표처럼 활용하며 도돌이표가 붙은 악보를 연주하듯 진행시키는 독특한 화법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내 글 속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느꼈던 감정과 경험을 재창조하려 노력했습니다."
시나 노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온다. 감성을 통로로 삼아 우리 깊숙한 내면으로 들어오는 그 느낌을 선명한 단어로 분명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까닭은 안개를 손에 잡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인 것 같다. 물성이 있지만 없고, 개념이 있지만 없고,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인, 아주 모호한 느낌이 시와 노래로 전달된다. 포세의 소설이 그랬다.
이야기의 서두는 주인공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는 당황한다. 왜 내가 이 길로 들어섰을까? 그의 생각은 꼬이기 시작한다. 아니, 생각이 꼬여서 그는 이런 이상한 선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숲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더 깊이 숲 속으로 들어간다. 더 깊은 혼돈 속으로.
잘 쓴 소설을 읽을 때면 소설가가 무당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작가 자신도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진실 같아, 하는 느낌을 받을 때 그렇다. 놀랍게도 욘 포세는 그렇다고 고백한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글을 쓸 때면 이미 그 글이 내 안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그 글자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냥 적어두기만 하면 된다는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글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써 내려갈 때도 있지만, 종종 그 글을 다시 작성하고 내 손에서 완성될 때까지 밑줄을 그어가며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펴볼 때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그냥 숲길로 들어서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길을 꺾어 들어가며 더 깊이깊이 들어가서 결국 숲에 갇힌다. 차는 진창에 처박혀 빼지도 못하고, 날은 저문다. 그리고 문득 내린 눈으로 숲은 하얗다. 그는 차 밖으로 나와 도와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길을 되돌아 나가는 쪽이 아닌, 더 깊이 들어가는 쪽으로. 그가 잃어버린 길은 숲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있는 길인 듯 싶다. 하얗고, 춥고, 길이 없고, 어두워져 버린, 혼자 있는 세계. 살다 보면 이런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가지 않은 길'을 떠올렸다. 그 길은 많은 가능성 중에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을 아쉬워하는 시로 읽혔다. 욘 포세의 길은 막다른 길이다. 더 이상 길이 아닌 길. 아쉬움이 아니라 당황함으로 가득한 길. 프로스트의 낭만은 통하지 않는 실존의 길. 우리가 가는 길, 우리가 하는 선택은 우리 의지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지금 있는 이 지점은 내가 선택해서 온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끌여당겼던 게 아닐까, 하는 지극히 의심스런 의심을 해볼 때가 있다.
소설 주인공은 명백히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명백히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는데, 우리의 인생이 이처럼 거대한 숲이라고 할 때, 눈이 내리고, 길은 진창이고, 인적은 없고, 끝내 어둠이 내릴 때, 그럴 때, 우리가 정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장담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시를 쓰는 것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포세에게는 소설도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시 같이 쓰인 이 소설은 긴 기도인 셈이다.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도 기도일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운율을 느끼고 음악을 듣는 착각을 하는 나 역시, 그렇다면,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중일까?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니 포세의 기도를 나도 한번 따라 해보는 중일까?
아니,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도가 아니라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일지 모른다. 아니, 진정한 사람은 기도할 수 있고 한편으로 기도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므로, 결국은 어떤 쪽이든 최선일지 모른다.
"내게 글쓰기는 귀를 기울여 듣는 일입니다. 글을 쓸 때 나는 결코 사전에 준비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듣기만 할 뿐입니다."
침묵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시를 읽는 것, 시 같은 소설을 읽는 것, 기도하는 이의 기도를 무신론적 저항 없이 그냥 순하게 들어보는 것,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이 공허함이나 그 어떤 절박한 이유로 낯선 숲 속으로 들어와 길을 잃고 세상의 막다른 끝에 도달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나,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