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탔다는 소식이 마치 옆집 아이가 대학에 붙었다는 소식만큼이나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껴졌던 건 나만의 경험일까? 그 어려운 일을 해냈네요! 잘 했네, 잘 했어, 하고 작가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은 나 자신을 보며, 늙어서 이러나, 싶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이상하게 격의가 없어져서 아무나 하고도 오랜 친구마냥 얘기가 통하니 말이다.
원래부터 애호하던 작가는 아니었고 <소년이 온다>만 읽었더랬다. 진심으로, 치열하게 썼다는 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문장이 좋았던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필시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 전달하는 것, 문장이 그려내는 것, 아니 문장을 호흡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문장 자체는 잊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독자로 하여금 문장이 불러낸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삶을 살고 나오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려면 작가는 목숨을 걸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이 아닐까 한다.
<흰>은 다른 누구에게보다 작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품이었을 것만 같다. <소년이 온다>를 쓰며 인간성의 극한, 동토의 땅, 피비릿내나는 지옥 세계를 다녀오고 나서도 계속 살아갈 수 있으려면, 아주 순수하고 아주 순한 기운 속에서 오랫동안 쉬어야 했지 싶다. 그랬어야 할 것 같다.
소설 속 화자는(작가는)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하고 먼저 목록을 만들었다. 그것은: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그리고 떠올린 존재는 자신의 죽은 언니였다. 눈처럼 하얀 강보에 꼭꼭 싸인 아기. 젊은 엄마가 추운 겨울, 혼자 집에서 낳은 아기는 두 시간만에 죽었다. 아기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검은 눈을 엄마 쪽으로 돌렸고, 엄마의 첫 젖을 조금 빨았다고 했다. 엄마 말이, 아기의 얼굴은 달떡처럼 희었다.
흰-은 순수하고 순하며 흰-에는 고요와 침묵이 감돈다. 흰-에는 슬픈 기색이 감도는 하얀 웃음이 배어있다. 흰-은 수의의 색이다. 흰- 속에 산 이와 죽은 이는 모두 가만히 치유된다. 그 자리는 생명과 환희가 흘러나오는 곳이기에. <흰>을 쓰며 한강 작가가 치유되었기를. 작가는 죽은 언니에게 잠시 몸을 내주었다고 했으니 언니 역시 치유되었기를 빈다. 모든 삶의 어려움에 지친 사람들 역시 흰-속에서 순하고 순수한, 깨끗한 몸과 마음을 받아 다시 태어나기를 또한 빈다.
레이스 커튼
얼어붙은 거리를 걷던 그녀가 한 건물의 이층을 올려다본다. 성근 레이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