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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

by 스프링버드


샐리,


누가 너에게,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의 너에게, 이런 얘길 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저 정신 나간 늙은이!" 나라면 정말 당황하고 화가 날 것 같아. 나와 나의 인생 전체를 부정당한 느낌일 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뭐라 하든 끄떡도 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꿋꿋이 간 사람이 여기 있어. 오늘은 이 특별한 사람 얘기를 해줄게.




바버라 쿠니 글,그림 / 우미경 옮김, 시공주니어, 1996(초판1쇄)



이 그림책은 제목 그대로 미스 럼피우스에 대한 이야기야. 주인공이 꽃을 보고 있는 표지 그림이 참 예쁘지? 꽃 이름이 낯설어. 루핀. 난 루핀 꽃을 잘 몰랐어. 어쩌면 한 번쯤 보기도 했을 테지만 특별히 내 눈길을 끌지 못했나 봐. 그런데 미스 럼피우스를 알게 되면서 루핀은 특별한 꽃이 됐지. 게다가 네가 사는 집 마당에 루핀꽃이 한가득 피어있지 뭐니!


이 이야기는 한 아이가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의 과정을 따라가. 아이의 이름은 앨리스야.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은 작은 아이 앨리스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했어.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렴.



앨리스는 이해할 수 없었어. 어른이 되면 아주 먼 곳에 가보고 싶고 할머니가 되면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라니? 어떻게 해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지? 어린 앨리스에게는 너무 막연한 말이었어. 그건 어른이 되어도 겨우 알까 말까 하는 일이고, 세상을 많이 알아도 결국 깨닫지 못하는 일일지 몰라. 할아버지의 얘기는 어린 앨리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이었지.


아무튼 시간은 흘렀고 앨리스는 자랐어. 모든 그림책은 특별한 재주가 있어. 이야기를 아주 명확하고 간단하게 만드는 거지. 이를테면 어른이 되는 일 같은 것. 그건 실제로는 지루하고 긴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그림책에서는 단박에 해결돼. 이렇게!


앨리스는 금방금방 어른이 되었어요.



앨리스는 어른이 되자 집을 떠나서 다른 도시로 나가. 도시에서 도서관의 사서가 된 거야. 이 그림책의 시대는 지금부터 적어도 150년 전인데 그 당시만 해도 여성은 사회적으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독립적으로 살기가 어려웠어. 미국을 예를 들어 보자면, 여성에게 선거를 할 수 있는 권리 즉 참정권을 처음으로 인정한 게 1920년이었어. 그런데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앨리스는 당당한 전문직 여성이 된 거야. 결혼도 하지 않은 것 같아. 사회에서 독립적인 성인으로 역할을 하게 된 앨리스는 이제 미스 럼피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렸지.


어린 앨리스의 꿈은 두 가지였고 그중 하나는 아주 먼 곳에 가보는 거였지? 미스 럼피우스가 된 앨리스는 가끔 식물원을 찾아가 거닐었는데 어느 날 식물원 온실 속의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와 재스민 향기를 맡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어.


여긴 꼭 열대의 섬 같다. 하지만 진짜 열대의 섬은 아니지.



미스 럼피우스는 도시보다도 훨씬 더 멀고 먼 곳으로 가보기로 결심했지. 아주 넓은 세상을 찾아서. 그 세상은 만년설이 덮인 높은 산봉우리이기도 했고, 정글이기도 했으며, 사막이기도 했어. 미스 럼피우스는 세계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허리가 너무 아픈 날이 찾아왔고, 미스 럼피우스는 다시 큰 결심을 해.


내가 너무 무리했나 봐. 어쨌든 여태껏 머나먼 세계를 두루 돌아다녔으니, 이젠 바닷가에 살 집을 구할 때가 된 것 같다.



뭔가를 시작하기로 결심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해. 하지만 뭔가를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것도 역시 큰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 어쩌면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시작하겠다는 결심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어.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일을 그만둔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미스 럼피우스는 이제 두 번째 꿈을 이뤘어. 바닷가에 집을 구했지. 집은 참 멋졌어. 아니, 세상은 이미 아주 멋졌어.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는 일'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걸 발견하려면 아직도 더 가야 할 길이 있었던 거야.


미스 럼피우스는 바닷가 집으로 이사 온 다음 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동안 몹시 몸이 아파서 침대에 누워만 지냈어. 그리고 다시 봄이 됐을 때 마침내 건강을 되찾고 언덕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언덕이 온통 푸른빛, 보랏빛, 장밋빛 루핀 꽃들로 가득했어. 미스 럼피우스가 아팠던 그 일 년 동안 집 마당의 루핀 꽃은 씨앗을 퍼뜨려서 언덕을 온통 꽃밭으로 만들었던 거야. 아,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찾았다! 미스 럼피우스는 탄성을 질렀어.


미스 럼피우스는 곧장 꽃씨 가게로 가서 루핀 꽃씨를 엄청나게 많이 샀어. 그리고 주머니에 씨앗을 넣고 가는 곳마다 뿌렸어. 들판에도, 언덕에도, 고속도로 곁에도, 시골길에도, 학교 주변에도, 교회 뒷마당에도, 도랑에도, 돌담 곁에도. 사람들은 미쳤다고 쑤군댔지.


저 정신 나간 늙은이


그러거나 말거나. 미스 럼피우스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일을 했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왔을 때, 온 마을에는 루핀 꽃이 가득했지.


시간은 흘렀고, 미스 럼피우스는 이제 할머니가 됐구나. 이제 사람들은 미스 럼피우스를 루핀 부인이라고 불러. 한때 앨리스였고 그다음에는 미스 럼피우스였고 이제는 루핀 부인이 된 우리의 주인공. 그 삶의 시간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면 나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이 그려져. 루핀 꽃이 가득 핀 언덕의 아름다운 길. 그 긴 길을 앨리스가 걸어가. 집을 떠나 먼 도시로 나가고, 도시에서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다가, 더 먼 낯선 세상을 여행하는 앨리스. 그리고 여행을 멈추고 자신만의 집, 어릴 때 꿈꿨던 '할머니가 되면 살 바닷가의 집'으로 돌아오는 앨리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지. 하지만 그건, 저 언덕길 같은 구불구불한 시간의 길을 걸어야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건, 저 시간의 길이 너를 데려다주는 어떤 지점에서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깨닫게 되는 일일 거야. 그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무수히 많은 일들 가운데 너의 길과 이어진 너만의 특별한 일일 거야.


길을 나서는 건 두렵고 망설여지지. 집을 떠나 먼 도시로 가는 것도, 더 멀고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적절한 순간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오는 것도 모두 쉽지 않아. 결심이 필요해. 하지만 언덕의 저 구불구불한 길처럼 길은 이어져 있겠지. 구부러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별별 말을 하더라도, 길은 이어져 있겠지. 중요한 변화가 있을 때, 크고 작은 결심을 해야 할 때, 용기가 필요할 때, 앨리스와 미스 럼피우스와 루핀 부인을 떠올려봐. 길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질 거야. 그래서 저토록 아름다운 언덕길을 만들어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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