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읽어볼까.
표지 그림을 보니 주인공과 악당의 대결이겠네. 밀대와 나무 숟가락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아마도 빵집 주인일 테고 샌지는 악당한테 당하는 모양인 걸. 표지 왼쪽에서 세모꼴 눈을 한 낙타가 빵집 주인을 째려보고 있어. 그러니까 배경은 사막의 나라 어딘가란 뜻이겠지. 표지만 봐도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겠다. 악당이 약자를 괴롭히다가 결국 혼이 난다는 뻔한 이야기일 거야. 하지만 결말이 분명해도 우리는 재미나게 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 왜냐면 이야기의 묘미는 바로 '어떻게'에 있기 때문이야.
이야기의 주인공 샌지는 여행가야. 이 이야기는 샌지가 젊었을 때 우연히 가게 된 전설의 도시 후라치아에서 벌어져. 이야기를 더 이야기스럽게 만드는 두 장치네. 시점은 지금이 아니라 오래전 주인공이 젊었을 때고, 장소는 현실의 장소가 아니라 전설의 도시라는 점 말이야.
이곳은 장사꾼들이 향료, 보석 그리고 울긋불긋한 비단을 팔고 사는 멋진 곳이었지.
샌지는 이 도시에 잠시 머물기로 마음을 먹고, 아담하고 아늑한 작은 방을 하나 구했어. 방은 샌지 마음에 쏙 들었는데, 1층에 빵집이 있었거든. 샌지는 빵집에서 풍기는 맛있는 빵 냄새를 맡으며 아침잠을 깼고, 저녁에도 맛있는 빵 냄새를 맡으며 집으로 돌아왔어. 고소한 검은 빵, 달콤한 롤빵, 바삭한 참깨 과자, 갓 구운 계피빵, 오렌지 파이, 대추빵, 호두과자... 샌지는 빵 냄새를 맡고 또 맡았어. 음흉하고 탐욕스러운 빵집 주인이 자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러던 어느 날 빵집 주인이 샌지의 방문을 쾅쾅 두드렸어. 그리고는 소리쳤지.
이 도둑놈아!
넌 내 빵 냄새를 훔쳤어!
이게 뭔 얘기람? 빵집 주인은 샌지를 윽박질렀어. 아침저녁마다 '내' 빵 냄새를 맡았으니 냄새 값을 내놓으라고 말이야. 빵집 주인은 알았겠지, 샌지가 이방인이란 사실을. 이방인은 약자잖아. 빵집 주인은 약자를 괴롭히는 전형적인 강자의 모습이지? 샌지는 억울해했고 빵집 주인은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했어. 빵 냄새 값을 안 내면 널 고소하겠노라고. 둘은 재판소를 찾아갔어. 재판관 앞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빵집 주인이었어. 재판관은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은 뒤에 샌지에게 물었어.
"넌 빵 냄새를 맡았느냐?"
"예, 재판관님."
"그러면 빵 냄새 값을 내었느냐?"
"아니요, 재판관님. 안 냈어요."
재판관은 다음날 아침 9시에 다시 와서 재판을 받되 샌지에게는 은닢 다섯 냥을 가지고 오라고 했어. 샌지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은닢 다섯 냥을 빌렸는데, 그 돈을 어떻게 벌어서 갚아야 할지 막막했고 그래서 슬펐어. (샌지는 좋은 사람이었나 봐. 그림을 보면 친구들이 흔쾌히 돈을 빌려주네.)
마침내 다음날 아침이 되었어. 샌지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서 있었고 빵집 주인은 씽긋 웃으며 두 손을 비볐어. 돈을 공짜로 벌겠구나, 했겠지. 이제 재판관이 판결을 내릴 순간이야. 그는 커다란 놋쇠 그릇을 샌지 앞에 놓고 한 번에 한 닢씩 그릇에 동전을 던지라고 했어. 그리고 빵집 주인에게는 그 소리를 잘 들으라고 했지.
짤랑, 딸랑, 딸그락, 땡그랑, 떨그덕
동전 떨어지는 소리는 듣기 좋았겠지? 부자가 되는 소리다! 샌지가 동전을 다 던지고 나자 재판관이 빵집 주인을 쳐다보며 말했어.
"넌 딸그락 짤랑하는 동전 소리를 들었느냐?"
"예, 재판관님."
"그럼 됐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이 네가 받은 값이니라."
하하, 명판결이지? 재판이 끝나고 샌지가 법정을 나오는데 (돈을 꿔줬던) 친구들이 쪼르륵 서서 샌지를 기다리고 있네. 손을 내밀고 "알지?" 하는 표정을 짓고서. 그 표정들 속에 깨알 웃음이 담겨있어.
<샌지와 빵집 주인>은 그냥 재밌자고 읽는 이야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의 억울한 마음을 좀 풀어주고 싶기도 했어. 현실에서는 나쁜 놈들이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약자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옛날이야기에선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고 선량한 주인공은 친구들이 항상 도와줘.
얼마 전에 네가 잔뜩 화가 나서 나에게 이모(진짜 이모 말고 이름만 이모라고 부르는) 욕을 했잖니. 억울해서 울먹이기까지 했어. 이모가 무심결에 던진 말에 상처를 받아서 말이야. 맞아, 화가 나지. 그럴 때 이 이야기 속 명판관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명쾌하게 선악을 구분해 주고 경솔한 말을 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면 얼마나 마음이 후련할까.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약자야. 자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회도 권리도 잘 주어지지 않지. 마음도 약해서 눈물부터 쏟아지기 일쑤고. 어른들은 잘난 척을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을 절대 닮고 싶지 않을걸?
한편으론, 현실은 선악으로 선명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 애매한 일도 많고, 어른도 아이도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나빠서 판단을 하기가 참 어렵기도 해.
좋은 이야기는 그래서 필요한 거야. 우리에게 선과 악을 선명하게 알려주고 현실이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에. <샌지와 빵집 주인>의 현명한 판결은 우리에게 단순 명쾌하게 정의의 방향을 알려줘. 마치 도로의 표지판처럼 말이야. 이야기는 현실이 어려운 수학문제 같아도 잘 풀어보면 풀릴 수도 있다고 말해. 우리가 바라보고 보호해야 할 가치, 따라야 할 태도, 지혜, 명료한 판단력 같은 걸 보여줘.
빵집 주인이 말을 하고 재판관은 귀 기울여 들었지... 재판관은 한참 동안 생각했지. 그러고는 말했어...
책 속의 현명한 어른은 너와 나, 우리들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고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지. 가령 저 재판관은 문제 앞에서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는 사람'이며 그런 다음에 '말하는 사람'이야. 풀기 힘든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보여주는 어른. 현실에 이런 현명하고 든든한 어른이 있든 없든 이야기 속에는 반드시 있어. 이 어른은 책을 펴면 언제나 나타나서 널 도와줄 준비가 돼 있지.
그렇다고 현실 속에, 네 곁에 완벽한 어른이 없는 걸 슬퍼하지는 마. 우리는 모두 허점투성이인 걸. 너나 나나,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허술하고 욕심도 부리고 실수도 하고 경솔한 말도 툭툭 내뱉는 허점투성이 인간들이야. 널 억울하게 했던 이모를 빵집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이 이야기를 읽으렴. 속이 후련하게. 그러고 나면 왠지 이모도 심지어 빵집 주인까지도 어쩐지 좀 불쌍하게 보일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