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도 나를 이루는 하나의 감정이다, <인사이드 아웃>
최근 SNS에서 재밌는 짧은 글을 보았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 에이스가 죽었을 때, 지은탁이 죽었을 때, 폴 워커가 죽었을 때다." 이 글을 보고 나는 크게 공감하며 웃었는데, 한 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눈물에 인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나 남자들은 더하다. 울면 나약하거나 소심하다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은 말한다. '울어도 괜찮다'고.
어렸을 적 엄마는 나를 차갑다고 생각했다. TV나 영화를 보며 슬픈 장면이 나와도 잘 울지 않고 오히려 그런 장면이 나오면 다른 채널로 돌리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주 작은 것만 봐도 눈물이 나는 '울보'다.
내가 애기였을 때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한다. 너무 울어서 엄마의 사촌들까지 그 사실을 알 정도라고 했다. 조금 더 커서도 울음은 그치질 않았는데, 아주 작은 것에도 울었고 조금만 서러워도 울었다고 한다. 유치원 때는 '김치가 먹고 싶다'고 울었고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울었고 '샤프를 쓰고 싶다'고 울었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가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해서' 울었고 '피아노를 치기 싫어서' 울었다. 정말 각양각색의 이유로 나는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점점 커가면서 울고 있는 나에게 엄마가 말했던 건, "그만 좀 울어"였다.
한 동안 그 말을 되돌아보면서 많이 서러웠다. 서럽게 울고 있는 나에게 어떻게 부모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그것이 나에게 트라우마가 될 것이라 생각은 안 했는지. 그러나 이해는 한다. 나의 눈물로 엄마가 얼마나 많이 힘들어했을지 상상한다면. 내가 나중에 부모가 되어도 똑같은 감정을 겪을 것이다. 다만,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그 이후로 사춘기가 되면서 나는 울음을 멈췄다. TV에 안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채널로 돌려버렸다. 길을 가다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영화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재미없어"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했다. 이런 나를 본 엄마는 "너는 정말 차갑다"라고 말했다.
이런 나에게도 정말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아마겟돈>이다. 내가 유일하게 눈물이 났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해리가 살아남을 기회를 얻었음에도 자신의 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그녀의 남자친구를 살려주는데, 브루스 윌리스의 대사가 압권이다. "널 언제나 아들처럼 생각했어" 그의 감정과 생각,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치는 기분이 들어서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장면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울곤 한다. 처음부터 영화를 봤던, 중간부터 봤던, 혹은 그 장면만 보던. 이 영화가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나도 울 줄 아는 사람이구나'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울고 싶었다.
안타깝고 불쌍하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눈물을 흘렸다. 단지 나의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만 눈물을 흘렸다. 그게 쌓이고 쌓여 나의 속을 문드러지게 만들었다.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감정 중에서 '기쁨이'는 독보적이다. 모든 감정들의 리더이자, 메인 컨트롤러다. 그녀는 라일리가 항상 행복해야 한다고 믿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라일리의 기억의 대부분은 노란색이다. 때문에 기쁨이는 슬픔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꾸 그녀를 가두려고 한다. 왜냐하면 슬픔은, 눈물은, 라일리를 슬프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일리가 이사를 간 뒤부터 자꾸 슬픔이가 등장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자꾸 감정에 개입하고 조작한다. 나는 이 점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라일리는 이사를 했고 친구들과 떨어졌고 낯선 환경에서 적응을 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당황스러움 혹은 슬픔을 겪지 않을 아이가 누가 있을까? 그러한 당연한 감정의 변화를 인사이드 아웃은 세심하게 그려낸다. 라일리가 감정의 변화를 겪고 있음을, 기쁨이가 부정하려 해도 자꾸 슬픈 감정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기쁨이는 슬픔이를 인정하게 된다. 슬픔이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슬프다'는 감정도 라일리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이 함께 해야 라일리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라일리가 하키 경기에서 졌을 때도, 빙봉이 라일리에게 잊혀질까 두려워할 때도, 그 옆에 있던 것은 언제나 '슬픔이'였다. 어쩌면 슬픔은, 눈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지금의 나는 울컥 울컥 눈물이 나올 때가 많다. 길을 가다 힘들게 걸어가시는 할머니를 보면 울컥하고, 콜드플레이의 첫 내한의 첫 곡을 들었을 때 눈물이 났으며,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사라지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울어버린다. 얼마 전 <미녀와 야수>에서 하인들이 서로 작별인사하는 장면에서 조차 혼자 오열해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당황해했다. 맞다, 사실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성인이 되고 연애를 하면서 자연스레 '슬픔'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나고 때로는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이후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슬픔을 이해해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가 우는 거 이제 지겨워" 그 말에 큰 상처를 받고 나는 한동안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우는 것을 참아야 했다. 내가 지금 당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내가 당신에게 '기대고 싶다', '의지하고 싶다', '이야기를 들어줘라'라고 말하고 있다는 신호를 알아차릴 사람이 우리에겐 꼭 필요하다.
눈물에 각박한 이 세상에서 나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 일지도 모른다. 다만, 모든 이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온 세상이 눈물로 가득 차면 안 되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낼 수 있는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보다 두려워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진짜 어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