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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흰 Mar 30. 2021

그의 마지막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고흐와 나의 죽음에 관하여, 3월 21일 일요일


나는 살아있다. 어찌되었든 나는 지금 살아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짧게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오른손의 손금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남들에 비해 너무나도 짧은 생명선은 손톱으로 꾹꾹 눌러 찍어도 길어지지 않았다.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이 있지만 난 천재는 아니기에 남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고흐는 일찍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흐의 죽음이, 종현이의 죽음이, 진리의 죽음이 나의 죽음을 부추겼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있다.


글로 쓴 우울증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우울할 때만 글을 썼고 그럴 때면 나 자신에게 더 깊이 파고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와 비슷한 과거를 가진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비관적인 마음이 공감되고 심해졌다. 남드에게 의지하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내 우울증의 주된 원인이고 지금의 나는 그들의 정서적 학대에 의한 산물이다. 결코 나아질 수 없었다. 지금의 남편이 된 그는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어디까지고 남일 뿐이다. 절대로 내가 될 수 없다. 이리저리 돌아보고 도움을 청해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결국 남은 건 내 안의 우울과 나 자신이었다. 나를 계속 살리는 것도, 나를 죽이는 것도 결국 나의 몫이었다.


고흐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외로움이었다. 이 세상에 나 하나 이해해주는 사람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 나로 인해 경제적 정서적으로 허덕이는 나의 동생, 그리고 사랑 하나 없었던 그의 외로움 삶 때문이다. 항상 고흐와 관련된 글을 쓸 때마다 나는 그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삶엔 사랑이란 없었다. 언제나 죽은 형의 그림자 뒤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지켜보기만 했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어떤 이유로든 그의 곁에 남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의 옆을 지켜준 그의 동생은 언젠가부터 그의 존재가 부담스럽다는 것을 티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토록 바라왔던 단 한 명의 사랑조차 갖지 못했다. 나는 사랑 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고흐는 죽음을 택한 것이다.


어찌보면 나의 선택도 비슷하다. 내가 사랑을 원했던 사람들은 나의 진짜 모습, 우울감에 지쳐 떠났고 부모님은 항상 나에게 완벽하고 무결한 딸을 원하셨다. 그리고 외로움에 지쳐 결국 정착한 지금의 남편에게 나란 존재가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졌다. 다시 말하자면 삶의 이유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했는데 칼이 무뎠던 탓인지, 아니면 구급대원들이 빨리 온 탓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 마음가짐이 문제였을 것이다. 삶의 의지를 잃은 것이지, 죽믕에 대한 의지가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다음날 칼을 들고 화장실에 가려던 것을 동생에게 들켰기 때문이다. 고흐 역시 한동안 정신병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나의 끝 역시 그와 같을 지는 모를 일이다.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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