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국민을 병들게 하는 국민학교 선생들
1. 1982년 1학년 1반 폭력 교실 최×× 선생
―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늘 일에 바쁘셨던 부모님 덕분에 예비 입학 1주일 동안 나는 고모나 이웃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등교와 하교를 했다. 당시에는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정식 입학 전 예비 입학이라는 것이 있었다. 예비 입학 기간 1주일 동안 1학년 아이들은 교실로 가지 않고 아침 9시부터 운동장에 모여서 노래나 무용 등을 배우고 점심 먹기 전에 각자 집으로 갔는데, 학교를 너무 다니고 싶었던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아침 9시부터 11시 정도까지 3시간 이상 운동장에 8살도 안 된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고, 노래와 무용을 따라 하라고 하니, 벌써 지쳐 버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몇몇은 땅에 앉아 돌이나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거나 했고, 또 몇몇은 아예 운동장 한편에 계신 부모님 곁에서 계속 있었다.
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은 키가 큰 50대 중반의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늘 온화하게 아이들을 대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어린이는 손을 잡아 일으켜 주기도 했으며, 부모님 옆에 서 있는 아이들은 손을 잡아 대열 속으로 넣으면서 부모님들과 웃으며 얘기를 주고받았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이 장면이 아직도 떠오르는 것은 여전히 이름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담임선생님의 온화했던 모습이 내가 정식 입학을 한 후에는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 6개 학년 전체가 드넓은 운동장에 모였다. 당시 나의 누나는 4학년, 형은 6학년이어서 애국 조회 시간이 되면 나는 형과 누나를 찾았으나 먼지가 뽀얀 운동장에서 형과 누나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교장선생님은 전교생이 모이면 교훈을 크게 외치라고 했는데, 그 교훈이 ‘성실하고 슬기롭고 애국하는 어린이’였다.
3월 초 월요일 아침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으며, 교실도 추운데 운동장으로 나갈 때마다 나는 집의 아랫목이 늘 그리웠다. 예비 입학 때 그랬던 것처럼 운동장 조회 때 1학년 아이들은 바닥에 앉기도 하고, 몸을 꼬기도 했는데 그런 행동은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애국 조회 시간에 온화한 담임선생님이었던 최 선생은 둘째 줄에 앉아 있는 아이를 발로 세게 차 버렸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바로 섰고, 뒤편에서 보고 있던 나도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운동장 공기를 느꼈다. 최 선생은 그 아이를 시작으로 뒤로 성큼성큼 걸어왔으며 그때마다 우리는 ‘앞으로 나란히’ 간격을 맞추느라 정신없었다. 몇몇은 뺨을 맞기 시작했고, 나에게 다가온 최 선생은 자기 발로 내 발을 한 번 차고 지나갔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최 선생이 너무 무서웠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나는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빨리 달려갔다.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은 아까 일들을 까먹었는지 교실에서 뛰거나 돌아다니거나 했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오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잠시 후 담임선생님이 온 뒤에 뛰거나 돌아다니던 정신없던 그 아이들은 계속해서 뺨을 맞기도 발로 차이기도, 심지어 긴 막대기로 맞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순사가 약한 조선인들을 때리듯 피도 눈물도 없는 폭행은 한 10분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순간 교실은 얼어 버렸고, 뒤쪽에서 우는 어린이도 보였다. 이후 최 선생은 자주 아이들을 때렸고,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이제 학교는 더 이상 즐거움의 공간이 아니었고, 나는 그때부터 교실에 앉으면 우울했으며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떠들거나 뛰지 않고, 숙제만 하면 최 선생에게 맞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나는 폭력을 직접 당하는 일이 없어 며칠간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최 선생은 책에 있는 내용을 공책에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을 자주 시켰는데,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나는 무슨 폭탄이 터진 줄 알았다. 머리에서 에밀레 종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으며, 소리와 동시에 눈물도 났다.
피라도 난 줄 알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고 혹이 난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나를 때린 인간은 다름 아닌 최 선생이었다. 선생은 내가 ㅇ(이응)을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쓰는 것을 뒤에서 보고 있다가 가격한 것이다. 명백한 폭력이었다.
그러면서 “이응을 똑바로 써.”라고 말하고 앞쪽으로 가 버렸다. 난 그날 처음으로 누구에게 맞아 보았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이 기억나는 건 선생이 어린 학생을 이렇게 세게 때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학년 생활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매일 맞는 애들이 발생했으니 수업 시간도 쉬는 시간도 너무 무서웠다. 최 선생은 주임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자주 비워서 교실에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수업 중에도 어머니들이 교실로 찾아오셨는데, 그때마다 최 선생은 반 전체 아이들에게 국어책을 보고 무언가를 베껴 쓰라고 시키고, 자기는 어머니와 온화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어머니의 자녀를 다정하게 “○○야. 이리 오렴.”라고 불러 어머니와 선생님과 아이가 교탁 옆에 그림처럼 나란히 앉아서 웃으며 얘기를 했었다.
어머니가 가시면 최 선생은 복도로 따라 나가서 인사를 하곤 했는데, 교실로 들어와서는 꼭 양복 속주머니를 체크했다. 나는 그게 촌지라는 것을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알았다.
그렇게 어머니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찾아왔고, 그때마다 반 아이들에게 요구르트 등을 돌리기도 했는데, 나는 어머니들이 찾아와 주는 게 너무 좋았다. 우리 엄마도 한번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머니가 찾아온 어린이는 이후 어린 나도 알 수 있게 최 선생의 사랑을 받았고, 어머니가 찾아온 적이 없는 어린이는 차별을 받았다. 이를테면 바지에 소변을 보는 실수가 있을 때 어머니가 찾아온 적이 있는 아이는 너무나 친절하게 집으로 보냈으나, 어머니가 찾아온 적이 없는 아이에게는 소리를 지르면서 나가라고 했다.
1982년의 학교는 병원, 은행, 재활용 분리소, 쌀 수거 기관, 국군 위문 기관 등 정말 다양한 역할을 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무슨 주사를 모두 맞아야 하는데, 감기에 걸리거나 질병이 있는 어린이는 안 맞아도 되었다. 나는 주사 맞는 날 아침 여러 번 기침을 했다. 그리고 유달리 그날 아침 아픈 척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주사를 맞으러 번호대로 나와야 하고, 간호사 같은 분이 간단하게 문진 같은 걸 했는데 생년월일이 빨랐던 나는 처음으로 불려 갔다.
최 선생이 감기 걸렸냐고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네. 아침부터 기침을 했습니다.”라고 해맑게 대답했는데 동시에 뺨이 얼얼해 졌다. 최 선생은 내가 주사를 안 맞으려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서 내 뺨을 후려친 것이다. 그날 내가 감기에 진짜 걸린 것인지 아니면 주사를 맞기 싫어서 그랬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뺨을 맞은 것은 명확히 기억이 난다.
1학년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건, 처음 학교로 들어간 코흘리개인 나에게 학교는 커다란 좌절과 상처를 겪게 해 준 공간이었고, 교사가 두렵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최 선생은 죽었겠지만, 1982년 우리 반 40여 명의 마음속에서 최 선생은 이미 여러 번 죽었을 것이다. 물리적 죽음이 아니겠지만, 어린 학생들의 마음속에서 최 선생은 1982년에 이미 죽은 상태인 것이다. 정말 끔찍한 건 최 선생이 몇 년 후 KBS 〈사랑방 중계〉(당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아이들과 연을 날리는 인자한 선생님으로 출연한 것이다. 나는 ‘세상은 저렇게 악한 괴물도 천사처럼 볼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토요일 밤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