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교사라는 꿈에 닿기

제1장 재수생에서 교육대학원생까지

by 이상훈

나는 수능 1세대다. 1993년에 수능이 처음 탄생되었는데, 그해는 두 번 수능을 보고, 둘 중 총점이 높은 성적표를 대학에 제출할 수 있었다. 1학기 수능은 엄청 쉬웠고, 2학기 수능은 엄청 어려웠다.

1학기 수능을 폭망한 나는 2학기 수능에서 만회하려 했지만, 우리 반, 아니 우리 학교에서 2차 수능에서 1차보다 더 잘 본 학생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전국에서도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아무튼 그때 수능은 미쳤다.

수능을 망치고 나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내신이 좋아서 시험 없이 재수학원에 등록했는데, 그때 당시 재수학원에 들어가려면 필기시험도 합격해야 했고, 심지어 종로나 대성학원은 대학보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도 있었다. 진짜 재수(再修)도 재수(財數) 없으면 못 하는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는 서울 남산 밑에 있는 정일학원에 다녔는데, 그 학원은 여학생의 비율이 너무 높아 일명 쌍쌍 파티가 많았다.


종로(학원)는 술이요, 대성(학원)은 당구요, 정일(학원)은 여자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재수생들 사이에서만.

남중, 남고 나온 나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쁜 여학생이 많았다. 당연히 커플도 많이 생겼고, 심지어 O.T니 M.T니 대학생 흉내까지 내는 정신없는 재수생도 많았다. 학원에서 그렇게 노는 사람들이 나는 되게 한심해 보였다.


우리 반에는 30세가 넘은 분도 있었고, 심지어 옆 반에는 스님이 다니셨다. 수녀님도 계셨고….

재수학원도 학교와 마찬가지로 담임도 있었다. 우리 담임은 지각하는 학생들을 엄청 혼냈는데, 나도 학원 가기 싫어 지각을 엄청 자주 했다. 담임은 종례 시간에 재수학원비 미납자 이름을 크게 부르며 납부할 것을 독촉하기도 했다. 어쩜 학교 선생이나 학원 선생은 다 하나같이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학원이 끝나면 늘 남산도서관에 걸어가서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그 버스도 곧장 집으로 가는 것을 타지 않고, 서울시청까지 가서 다시 돌아오는 83―1 버스를 애용했다. 그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 야경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을 나는 좋아했다.

재수학원의 선생들은 다들 어찌나 못 가르치는지. 이 사람들은 진짜 안 되겠다 싶었다. 재수하면서 수학을 시작해서 진짜 좋은 대학 가려고 했는데, 솔직히 수학은 더 포기하게 되었다. 수학 강사가 푼 답과 답안지의 답이 이렇게 자주 다른데 내가 거기서 무얼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재수를 하고도 점수가 별로 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험을 하면서 대학을 지원했다가 삼수하게 될까 봐 점수에 맞게 안전하게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면 국어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교직과정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는 절망했다. 에휴, 왜 그때는 입시 상담을 그렇게 엉망으로 했단 말인가? 분명 우리 담임이 국어 선생 되려면 국어국문학과 가라고 했는데. 결국 나는 국어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까지 진학해야만 했다.

취업이 안 되는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이 많아 다들 대학원을 진학하는 분위기여서 교육대학원도 가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나는 5개 대학원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 5개 모두 합격했다. 고등학교 때는 성적이 안 되어 못 들어갔던 대학에 대학원생으로 들어가서 공부하니 좋긴 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교육학 공부도 하고, 교생실습도 나가면서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했다. 대학원에서는 5학기에 논문을 써야 했는데, 난 대학원 다니면서 결혼을 해서 공부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다. 나의 5학기 계획은 논문을 대충 쓰면서 임용고시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결혼을 한 나는 임용고시를 무조건 한 번에 붙어야 했다.

5학기에 논문을 쓸 때 담당 교수가 배정되는데, 나는 정말 깐깐한 정수기 같은 젊은 교수가 배정되었다. 그때는 한 교수당 두 명의 대학원생이 배정되었고, 교수와 밥을 먹으면서 친분을 쌓으면 논문이 쉬울 거라고 대학원 선배들이 조언했다.

그런데, 깐깐한 교수에게 배정되었던 나와 내 동기는 학부만 졸업하고 바로 와서, 교수와 밥 먹고 친분 쌓는 것 같은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내 동기는 갑자기 논문 학기에 휴학을 해 버렸다. 깐깐한 정수기 같은 교수는 정수기 코디처럼 나의 논문만을 진짜 많이 지도해 주었다. 내 논문을 마치 박사논문처럼 지도했다. 아니 지시했다. 다른 대학원 동기들 얘기를 들어 보니 두꺼운 리포트 쓰는 수준으로 하면 될 거라는데, 왜 나는 교육대학원 석사논문을 무슨 박사논문처럼 써야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교육대학원생이 왜 일반대학원생 세미나에 가야 했는지…. 아무튼 나만 그렇게 깐깐하게 논문을 검토받았다. 다행히 나는 대학원을 수료가 아닌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논문이 되지 않아 자랑스럽지만, 내 논문을 누가 읽겠는가?

아무튼 임용고시 공부를 할 시간도 없어 나는 그해 임용고시에 똑 떨어졌다.

아, 하나 빼먹었다. 그때 내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임용고시 떨어진 다음다음 달에 첫아기가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 똑똑하다고 생각한 나의 자만심은 임용고시 실패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임용고시는 대학원 공부하고는 다른 차원이었고, 똑 떨어진 나는 너무 우울하여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괜찮다고 했고, 아내도 그랬고, 장모님도 그랬지만…. 내가 안 괜찮았다. 아이가 태어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문제에 인생 처음으로 봉착한 것이었다.



가끔 그 시간들을 다시 생각하면 끔찍하다.

어쨌든 나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할 줄 아는 것은 가르치는 것밖에 없어서 나는 기간제교사라도 해야 했다. 임용고시 점수가 그렇게 낮지 않아서 재수하면 붙을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재수하면 내 아내와 내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물론 아내는 내가 재수해도 응원했겠지만….



이때부터 나의 사립학교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교사로 있으면서 경험한 얘기와 상상한 얘기, 그리고 들은 얘기들을 풀어 보려고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쓴 얘기가 모두 사실은 아니며, 처음에 밝혔듯이 비슷한 사건과 인물이 있을지라도 그건 모두 우연이다.


학교는 진짜 다양한 인간의 집합소다.

지금부터 나는 사립학교에 임용되어 16년 근무하고 사립학교를 나오기까지의 경험과 상상, 그리고 들은 얘기들을 본격적으로 기록하련다.


이 글이 교사가 되려는 임용고시생들에게 또는 현직 교사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얘기가 교직에 관한 하나의 처세론을 넘어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알게 해 주는 지표가 되길 희망해 본다. 시작한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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