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016년 5월 18일
자료는 이제 대충 정리되었다. 나름 보니 콘셉트만 잘 잡으면 괜찮을 것 같다. 행정실 기사님들의 도움으로 옛날 의자와 그 옛날의 학교 종도 찾았고, 교장실에 있는 앨범들을 스캔하니 대충 자료는 충족되었다. 박물관 안에는 허연 장이 몇 개 들어왔는데, 그걸 보고 적지 않게 실망을 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어서이다. 약간 힘이 빠졌으나 추가로 유리 장을 주문하기로 마음먹었다. 비용은 조금 들었지만, 이왕 하는 거 대충 하기는 싫었다.
박대용 선생님을 시작으로 몇 분의 선생님이 자료를 보내 주셨고, 몇 분은 내가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대부분 희망고등학교에 대한 벅찬 애정과 감성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젊은 날은 모두 희망고등학교였으니 말이다.
2016년에는 퇴근을 박물관으로 거의 했다. 박물관에 한참 앉아 있거나 이것저것 보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박물관에 앉아서 음악도 듣고, 책도 읽었으며 전시물도 보면서 나의 아지트 및 예술 작품 감상실 정도로 사용하였다.
5월은 학교행사로 정신없었다. 나는 개교기념일에 즈음하여 박물관 개관식을 진행하려고 했다. 내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퇴직 교사들을 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수차례 나에게 전화를 걸고 진행 상황에 관심이 많았던 박대용 선생님이 오시느냐가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박대용 선생님, 혹시 5월 18일 개관식에 참석 가능하신지요?”
“허허, 그럼 내가 가야지. 내가….”
개관식을 앞둔 날 밤 나는 박물관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한 세 시간 정도 있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 박물관의 콘셉트는 영화 〈러브레터〉 + 〈내 마음의 풍금〉 + 〈시네마 천국〉이다.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이 박물관을 감쌌다. 어느새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정적을 뚫고 전화가 울린다. Art Garfunkel 〈Traveling boy〉….
“이상훈 선생님이시죠?”
“네.”
“박대용 선생님 집사람이에요.”
“아, 사모님 안녕하세요.” 불길하다. 불길하다.
“내일 박 선생님이 가기 힘들 것 같아서요.”
“네? 무슨 일이라도?” 불길하다. 불길하다.
“박 선생님이 다리가 불편하고, 그 아침까지는 학교에 갈 방법이 없어요. 시내에 사는 딸아이도 출근을 해서 학교까지 데려다줄 사람이 없어요. 그냥 개관식 잘해 주세요.”
잠시 머뭇거렸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아, 사모님 저도 ○○군에 살아요. 어차피 출근길이니 들렀다가 모시고 갈게요. 걱정 마세요.”
나는 ○○군에 살긴 산다. 그런데 그 선생님 댁과 나의 집은 30분 거리니 적어도 나는 6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군에서 학교까지는 1시간 걸리고, 아침에 미사가 7시 50분에 봉헌되니까 적어도 7시 20분에 도착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 눈이 떠진 건 5시다. 평소보다 30분 먼저 눈이 떠졌다. 오늘은 수영이고 뭐고 박대용 선생님 댁부터 가야 한다. 아침을 먹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니 5시 40분. 너무 빠르다. 너무 빠르다. 새벽이라서 지금 가면 차가 하나도 안 막힌다. 차를 보았다 너무 더럽다. 너무 더럽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태울 거면 청소부터 하자. 진공청소기를 가져다가 주차장에서 청소를 했다. 외부도 걸레로 깨끗하게 닦았다. 오랜만이다. 깨끗한 내 차.
6시가 되었다. 이제 출발이다. 박 선생님 댁 가는 길에 박물관 개관식 배경음악으로 쓰일 몇 곡을 틀어 보았다.
유키 구라모토 ― 〈Childhood days〉
Ennio Morricone ― 〈Cinema Paradiso〉
Patti Page ― 〈I went to your wedding〉
Nana Mouskouri ― 〈Try to remember〉
내 마음의 풍금 ― 〈연주곡〉
Patti 음악 대신 유키 구라모토의 〈A winter story〉를 추가했다.
박 선생님이 사시는 아파트는 자그마했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주차할 만한 곳이 없었다. 주차를 하고 전화를 드렸다.
벌써 일어나셔서 기다리신다. 내려오시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입구로 가서 정중히 인사드렸다. 지팡이를 짚고 계셨고, 다리가 불편해 보이셨다. 느릿느릿 걸으셨으며, 걸을 때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셨다.
“와 줘서 고마워요.” 사모님이 배웅을 하셨다.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선생님을 태우고, 학교 쪽으로 향했다.
음악을 살짝 틀었으며,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왜 학교를 떠나셨나요?” 첫 질문이 이게 튀어나오다니, 나도 미쳤다.
“허허…, 그때 이 동네는 미군들이 다 휘젓고 다녔어. 애들을 생각하니 떠날 수밖에 없었다우. 그래서 자식 교육을 위해 떠났지. 교장이 날 가지 말라고 잡았지만, 자식들을 생각하면 안 떠날 수가 없었어. 지금은 자식들 다 키웠어. 자식들 다 잘되었어. 외국 간 자식도 있고 다 잘되었어.”
“그러셨군요.”
“이 선생은 학교 몇 년째인가?”
“아, 네 저는 이제 13년 차입니다.”
“나는 희망고등학교를 잊지 못해. 사실 결혼식장이 없어서 학교 개교하기 전에 교실에서 결혼했어.”
“학교에서 결혼식을요?”
“그래요. 그때는 예식장 잡기도 어렵고, 그래서 그냥 허락받고 교실에서 결혼했지. 허허.”
‘그렇군. 희망고등학교는 박대용 선생님의 학교이자, 예식장이자, 젊은 날의 전부였군.’
박대용 선생님이 왜 그렇게 희망고등학교를 못 잊어하시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도 연락되시는 분들 많이 계세요?”
“뭐 다들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죽은 친구들도 있을 거야.”
귀가 어두우신 선생님께 크게 얘기하느라 목이 약간 아팠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고속도로가 시원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학교에 도착하자 김 선생님이 교장실 앞 주차장에 나와 있었다. 내가 어젯밤에 후배 김 선생님에게 특별히 예우해야 할 선배님이 있다고 말해 놓았다. 김 선생님은 마치 대통령 정도의 높은 사람이 학교에 방문한 것처럼 차문을 열어 주고, 박대용 선생님을 친절하게 잘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