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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들려오는 '그 놈 목소리'

'졌잘싸'대신 써 내려가는 '승리의 기록'

by MPL


오늘은 유독 힘들었습니다

최근 며칠간은 새벽에 눈을 뜨면 몸이 가벼웠습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알람이 울렸을 때 몸이 무거웠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렀습니다.

침대를 빠져나오는 데도 평소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잘까? 30분 정도 더 누워 있으면 피로가 풀릴 것 같은데...'

'무리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아. 오늘 하루는 쉬어도 괜찮아.'

'어제 늦게 잤잖아. 몸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그 목소리는 그럴듯했습니다.

너무나 달콤했고 합리적으로 들렸습니다.

저를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정말 1~2분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피로감이 클수록 그 목소리는 더 크게, 더 설득력 있게 들렸습니다.


작은 저항의 시작

거의 그 목소리에 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일단 발 하나를 침대 밖으로 뺐습니다.

그냥 발 하나만.

그리고 잠시 멈췄습니다. 그 때 또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래도 일어나야 하나? 정말?'

'피곤하면 더 자는 게 정상아닌가?'


그러다 발 하나를 더 뺐습니다.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마음속에서는 계속 아우성이 들립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누워도 돼. 30분만 더 자자.'


이불을 개는 순간

저는 이불을 개기 시작했습니다.

이불을 개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 따뜻한 이불의 포근함이 손끝에서 강렬하게 느껴졌습니다.

방금까지 나를 감싸주던 이불의 온기가 더욱 강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오늘은 힘듭니다.

하지만 힘들게 이불을 다 갰습니다.

이불개는 속도가 평소보다 2배는 더 걸린 것 같습니다.


마지막 관문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저 창문만 열면... 저 창문만 열면...'

침대에서 양발을 땅에 딛고 겨우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났습니다.

다리를 질질 끌며 창문으로 걸어갔습니다.

불과 1미터 거리인데 마치 10미터를 걷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손을 뻗어 창문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열었습니다.


훅 밀려든 찬 공기

바깥의 찬 공기가 훅 밀려 들어왔습니다.

밤새 저를 감싸주었던 방안의 온기가 갑자기 밀려든 찬 공기에 화들짝 놀라 사라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창문에 기대어 온전히 그 찬 공기를 온몸으로 맞았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면서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깨어났구나.'


그렇게 다시 저의 새벽 리추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더 이상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차를 마시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지금, 아까 그 피로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힘겨운 싸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봅니다.

아직 밖은 어둡지만 제 마음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습니다.


매일 다른 전쟁

어떤 날은 너무나 가볍게 일어납니다. 전쟁 없이 평화롭게 아침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어떤 날은 오늘처럼 숱하게 위기를 넘기면서 일어납니다.

발 하나, 발 하나. 이불 개기. 창문 열기. 하나하나가 전투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새벽 기상을 실천해왔지만, 역시나 쉽지 않습니다.


졌잘싸는 없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졌잘싸. 소위 '졌지만 잘 싸웠다.' 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놈 목소리에 진 날은 하루 종일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그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찝찝함, 불쾌함, 불편함 그 감정들이 그 놈 목소리의 유혹보다 더 크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아마 계속 되겠지만, 최소한 이 기분은 무조건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싸움에서 지지 않습니다.


그 놈 목소리와 싸우는 법

간간이 그 목소리에 질 때도 있습니다.

어떤 날은 정말 너무 피곤해서 다시 침대로 돌아갑니다.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듭니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목소리를 컨트롤하는 법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이깁니다.


첫째, 그 목소리에 바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일단 발 하나를 침대 밖으로 뺍니다.

둘째,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발을 빼고, 일어나고, 이불을 개고, 창문을 엽니다. 순서대로 움직입니다.

셋째, 창문을 엽니다. 찬 공기가 모든 것을 정리해줍니다.

넷째, 이긴 날을 기억합니다. '어제도 이겼잖아. 오늘도 할 수 있어.'

다섯째, 진 날도 용서합니다. '오늘은 정말 필요한 휴식이었어.'


쉬워지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새벽에 기상하는 것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쉬워지지 않습니다.

익숙해지는 것과 쉬워지는 것은 다릅니다.

싸움은 익숙해지만 여전히 싸움입니다.

어떤 날은 가벼운 스파링이고, 어떤 날은 오늘처럼 슈퍼 헤비급 챔피언과 싸우는 것처럼 힘듭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쉬워졌다면 성취감도 없었을 것입니다. 매일 이기는 싸움이었다면 승리의 기쁨도 무뎌졌을 것입니다.


승리의 기록

오늘 아침, 저는 그 목소리와 싸워서 이겼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발 하나를 빼는 데도 용기와 큰 에너지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승리의 기록입니다.

전 오늘 하루를 승리의 기록으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기록을 쓰고 있어서 너무 다행입니다.


'조금만 더 자자'는 목소리.

'오늘 하루쯤은'이라는 목소리.

그 어떤 목소리보다 달콤합니다.


어쩌면 내일 또 들릴지도 모릅니다.

내일도 달콤하고 평화롭고 합리적이고 맞는 말처럼 들릴 겁니다.

어쩌겠습니까? 또 싸우고 승리의 기록을 남겨야지.

이렇게 승리의 기록이 쌓여 갑니다. 한 장, 두 장, 세 장.


20251113.jpg 20251113 오늘의 날씨 _ 날씨도 좋고 많이 춥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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