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과 전조
※개인적인 경험이 다소 많이 들어있는 내용으로, 참고만 부탁드립니다. 개인사가 궁금하지 않은 분은 다음주를 기다려주세요.
내가 간과한 게 있다면 바로 내 기질이다. 비록 성인과 군자는 되지 못하지만 나는 잘못을 매듭지어놓지 않은 채로는 떳떳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는 사실은 내내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행복한 자리도 가시방석으로 만들었다. 나의 높은 기준이 나를 찌르는 비수가 되었다. 재미있다며 깔깔 웃다가도 문득 생각나는 불편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 시점에 연애를 시작했다. 그나마 누군가를 사랑하며 퐁퐁 솟아오르는 중독적인 행복감이 과거를 잊게 해 주었다.
부끄럽지만 나에게는 첫 연애였고, 또 판타지가 있었다.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얘기들을 그는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또 받아들이고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나무숲의 유일한 안식처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또 관계로 치유하는 법이니까, 생각하며 조금씩 나를 열어 가보자고 생각했을 때 일방적인 이별을 당했다. 잠수를 탄 사람을 꿋꿋이 찾아가 ‘그냥 마음이 식었다’는 확답을 들은 뒤 울며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그러게 어떤 사람이랑 만난다고 엄마한테 말을 했었어야지. 미리 뭐라고 말이라도 해두게.” “지금 이게 제 탓이라는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연락 좀 자주자주-”
그때 어머니의 말의 요지는 ‘연락 좀 자주 해라’였겠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다. 내 뇌리에는 ‘이게 제 탓이라는 거예요?’ ‘그래.’만 남았다. 내가 겪은 모든 고통의 명쾌한 해답. 바로 내가 문제였다. 나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수치심에 휩싸였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나를 문제로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실연의 아픔보다 부끄러움, 죄악감, 자기혐오가 크기를 키웠고 ‘나는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가벼운 기분 전환조차 거부했다. 그 별것 아닌 대화로 내 인생이 잿빛이 되었다.
다소 뜬금없는 과정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내 MBTI 가 INFJ라는 추가 정보를 제공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인간 군상의 내면에는 늘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고 있으며 나는 특히나 이 악마를 매도하고 숨기기에 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태 잘 숨기고 관리해 오고 있었던 그 악마가 갑자기 덩치를 키우더니 모두에게 까발려진 상황에 처했다는 망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은 나였다.
변수를 하나씩 정리하자면 본래 내 회복력은 나쁘지 않았다. 나와 관계없는 얘기라면 아예 듣고 흘릴 수 있을 정도로 둔해서 스트레스도 덜 받는 편이고 그마저 좋아하는 만화나 소설을 보면 금방 잊었다. 다만 유난히 예민해지는 부분이 딱 한 가지 있었으니, 자신에게만 박한 도덕적 허들이다. 내가 정한 기준에 스스로가 위배되는 순간 느끼는 어마어마한 죄책감은 가벼운 회복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하필 자라온 환경 탓에 나는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털어놓기 어려운 유형의 인간이었고, 흘러가지 못해 꽉 막혀버린 감정은 러시아워를 연상시킬 법한 교통체증을 일으켰다. 그뿐인가. 스스로에게 느끼는 수치심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나를 아는 사회의 모든 사람이 나를 보며 혀를 차는 것 같았다.
스스로의 도덕성에 예민한 기질, 고장 나버린 회복력, 성장 환경이 완벽한 조건을 완성했다. 이미 결과가 나온 것이나 다름없지만 나는 부정했다. 하루는 예뻐지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고 또 하루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 또 다른 하루는 재미있는 행사를 가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아는 사람이 망가진 내 모습을 보면 실망할 것이 두려워 의식적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다녔다. 아니면 필사적으로 멀쩡한 모습을 연기하던가. 나중에는 이렇게 신경 쓰는 것이 오히려 피곤해서 하루 만나고 말 수 있는 인연에 더 깊은 사정을 털어놓곤 했다. 전부 근본적인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과정들이었다. 그렇게 3가지 종목이 모여 정신병을 향한 트라이애슬론 경기를 완벽히 수행한 결과, 나는 20살 후반을 은둔의 계절로 보냈다.
사실 모든 원인을 꼽자면 수도 많은 원인과 결과들이 있지만 제일 거대한 기둥은 지금까지 설명한 3가지이다. 그 이후 병원을 처음으로 방문하기 전까지의 주요 증상들은 우울증 환자를 생각하면 으레 떠올리고는 하는 교과서적인 행동 그대로를 떠올리면 된다. 고립, 은둔, 등교 거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외로운 새벽을 보내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잘못된 선택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기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인데, 불행히도 참 자각이 느렸다.
그렇게 나는, 애써 힘들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죽도록 노력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에야 깨달았다.
나는 이미 깊은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