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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ug 10. 2023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물증

뜨개질(crochet)하는 시간



그러니까,

뜬금없는 뜨개질의 시작은 이웃의 제인 때문이었다.

마흔둘에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갖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엄마조차도 차마 말리지는 못해도 그게 되려나..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결혼하고 일년이 채 되기도 전에 임신을 하고 아주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순산으로. 아마도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하고 있는 주짓수 덕분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순산이고 아이가 잘 먹고 잘 잔다고 해도 육아는 그리 순탄한 길이 아니다. 평소에 차갑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똑 떨어진 성품의 커리어 우먼이었던 그녀에겐 어쩌면 상상보다도 훨씬 더 당황스럽고 난감한 순간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뭔가 좀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인을 위한 물건보다는 아가에게 필요하고 이왕이면 아가를 돋보이게 할 물건이면 좋겠다 싶어서 유모차용 아가 담요를 뜨기로 했다.하지만 코바늘로 이렇게 모티프를 떠서 완성품을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티프를 뜨는 것은 물론 색상 매치를 고민하는 일이 재밌었다.재밌을 뿐 아니라 코바늘 뜨기에는 묘한 치유 능력이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각각 다른 색상과 문양의 모티프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자정작용이 일어났다.


그래서 제인에게 선물을 한 후에도 뜨개질을 멈추지 않고 아이들의 모자와 조끼, 머플러, 파우치나 열쇠고리 같은 것을 떴다. 창밖으론 점점 더 햇살이 쨍쨍해지는 이른 여름인데... 아이에게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조끼와 머플러를 주면서 괜히 멋쩍어서 중얼거렸다. 금방 가을 온다... 그리고, 나를 위한 크고 멋진 숄더백도 떴다. 늘 맨 나중으로 미루던 '나'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 앞줄에 세운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마침 아이의 생일이 다가오기도 해서 선물 겸, 이왕이면 좀 큰 프로젝트(?)를 해 볼까 싶어서 담요를 떠주기로 했다. 하지만 모티프마다 같은 문양에 색상 조합만 바꾼 게 아니라 좀 다양하고 독특한 걸로 뜨고 싶어서 책을 살까 망설이던 중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마음에 쏙 드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한국에 사시는 분인데 내가 살까 말까 망설였던 책에 있는 모티프중에서 골라 하나씩 뜨는 과정을 올려놓은 것이었다. ‘함께하는 뜨개질[캣츠, 룸]이라는 곳인데, 나는 이미 갖고 있는 실 만으로 떠서 색깔 조합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세 권의 책에서 골라 올려준 덕분에 책을 사지 않고도 꽤 다양한 모티프를 뜰 수 있었다

.


마치 낯선 도시로 여행을 가서 소소한 일상의 것들을 하나씩 경험하는 것처럼 모티프를 떴다. 뜨기가 복잡할수록 즐거움이 더욱 커지는 건 아마 내 성향일 것이다. 그 즐거운 복잡함 덕분에 명료하게 이름 지을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불안, 혹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둔 후에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을 때 오는 불안 같은 것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뜨개질하는 동안 잊었던 것이겠지만 이렇게 잠깐씩 잊다가 희미해지고 결국엔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시간과 체력과 휴식과 마음의 상처 같은, 그동안 내가 잘 돌보지 못했던 것들이 뜨개질 하는 시간동안 나른하게 쉬는 게 느껴져서, 뜨개질을 하다가 커피를 만들고 비스킷 몇 쪽을 작은 접시에 담아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달콤했다. 비로소 이해한다. 아, 이래서 취미로 뜨개질을 하는구나.




아이들이 어릴 땐 대바늘 뜨기로 스웨터나 머플러 모자 같은 것들을 떠주기도 했다.하지만 그건 생필품 같은 거였다. 완성품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뜨개질을 하는 시간 자체는 힐링보다는 노동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결과만을 생각하며 과정의 고단함을 견디느라 정작 그 고단함 속에 숨어있었을 즐거움을 놓치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똑같았을 텐데...


사실은 아이 몰래 떠서 생일에 '써프라이즈~' 를 하려고 했는데 아이가 재택근무 하는 날이 많으니 금세 들켜버렸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선물을 받을 사람의 취향에 맞추려고 물었더니 '그래니 스퀘어'로 뜬 담요는 좀 유치한 듯 색상이 많아야 더 예쁘다길래, 맘껏 다양한 색실을 썼다. 아마도 나는 이 담요를 뜨면서 아이를 생각하는 내 마음의 물증을 욕심낸 걸 수도 있다. 우리에겐 때때로 눈에 보이는 사랑이 필요하다. 자신이 사랑받았다는 물증은 아무리 나이를 먹은 후에라도 가끔은 필요하니까.





아이의 생일선물로 준 담요. 크기는 120x120센티미터 정도, 모티프 36개를 이어서 만든, 무릎담요치곤 제법 커서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는 두 달 전에 직장을 바꿔서 근무 형태가 완전 재택에서 하이브리드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아직 재택근무하는 날이 더 많으니 날씨가 쌀쌀해지면 일하는 동안 요긴하게 쓸 것이다. 예쁘기도 하지만 순면이라 좋아하는 무게감도 있어서 맘에 쏙 든다며 나를 기쁘게 했다. 나는 누가 엄마 아니랄까 봐 그 감동에 현실을 덧붙인다. 이를테면 사용설명서라고나 할까.


100% 순면이라 보플도 안 생기고 세탁기에 막 돌려도 돼. 아마 엄마 죽고 난 다음까지도 쓸 수 있을걸? 아이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엄마!


사실은, 각각 다른 색의 25g짜리 20개 묶음으로 된 실을 샀더니 색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정작 뜨는 건 쉽고 재밌는데 색깔을 매치할 때 많이 망설였고, 꽤 여러 장의 모티프는 완성 후에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연결해서 담요로 만들어 놓으니 거슬리거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뺐다면, 새 실을 구입하고 시간을 더 들여 다시 뜨지 않는 한, 담요는 훨씬 작고 볼품 없어졌을 것이다. 아이의 생일카드에 이런 말을 쓰면서, 기억하기 싫고 마음에 들지 않는 미운 시간까지도 잘 연결해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삶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너무 열심히 떴는지 원래 시원찮던 어깨가 더 아프지만 몇 주 쉰 후에 다시 실을 샀다. 이쯤이면 중독인가 싶지만 앞으로도 뜨개질할 때의 그 온전한 집중의 시간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맛있는 것을 맘껏 먹으려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내 친구처럼 나는 뜨개질을 계속하려고 스트레칭을 열심히 한다. 안그래도 스트레칭이 꼭 필요한 몸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늘 마음만 컸지 며칠 하다 말곤 했는데 요즘엔 날마다 요가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도 하고 폼롤러도 굴린다. 우습게도 정말 뜨개질을 계속하기 위해서다.


삶에서 의미 있는 것은 '좋고 싫음'을 구분해서 '하고 하지 않고'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서로 잘 연결해서 부족함을 채워주고 넘침을 나눠주는 것이 아닐까. 마치 각각의 모티르로는 맘에 들기도 하고 풀어버리고 싶을 만큼 싫기도 하지만 서로 잘 연결하면, 그저 아름답고 포근한 담요가 되는 크로쉐이(crochet)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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