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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작별을 위한 첫마디

Dear Life, 먼로의 서점

by 윤서


밴쿠버의 트왓슨에서 페리를 타고 1시간 30분쯤 가면 밴쿠버 아일랜드의 빅토리아에 도착합니다. 빅토리아는 제가 사는 BC주의 주도입니다. 그곳에는, 아마도 캐나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일 'Munro's Books'가 있습니다. 이 서점의 이름인. 'Munro'는 201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캐나다의 작가 '엘리스 먼로'에서 따온 것입니다.


Munro's Books@Victoria BC


이 서점은 엘리스 먼로(Alice Munro)의 전 남편인 제임스 먼로(Jim Munro)가 만든 것으로 함께 사는 동안엔 엘리스도 서점에서 일을 했습니다. 엘리스는 틴에이저 때부터 글을 썼지만 출판으로 이어지진 못했고 결혼 후에는 아이들을 키우며 집안을 돌보느라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스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내가 글을 쓰면 여기에 있는 책들보다 더 잘 쓸 수 있어요.' 그 후 그녀는 서점 일을 그만두고 글쓰기에만 전념해서 1968년에 첫 단편집인 Dance of the happy shades를 발표했고 그 후로 많은 단편을 씁니다.


1951년에 결혼을 했던 두 사람은 1972년에 이혼하고, 짐은 빅토리아에서 계속 서점을 운영하면서 살고 엘리스는 온타리오 주의 홈타운 근처로 이사를 간 후 1976년 Gerald Fremlin과 재혼을 합니다. 하지만 짐과 엘리스는 이혼 후에도 엘리스의 새 책이 나오면 서점에서 출판 기념회나 사인회를 하는 등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혼 후에도 제임스는 서점 이름을 바꾸지 않고, 엘리스도 재혼을 하고도 첫 책이 출판될 당시에 썼던 성(Munro)을 그대로 씁니다. 필명이라는 개념도 있겠지만 사사로운 인연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함께 살아낸 한 시절과 그녀의 문학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보았다면 제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걸까요?



사실 저는 엘리스보다 제임스 먼로(Jim Munro)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1963년, 영화팬들을 서점으로 유치할 목적으로 극장 옆에 있는 상가에 서점을 열었습니다. 그 후 1984년에 그는, 예전에 은행으로 쓰였던 다운타운의 중심부에 있는 아름다운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을 사서 서점을 옮겼고, 먼로의 서점 덕분에 이 건물은 지역 주민들은 물론, 유명 인사나 작가,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명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빅토리아 올드 타운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듯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서점을 2014년에 함께 일하던 네 명의 직원들에게 [Jessica Walker(store manager), Carol Mentha (senior buyer), Sarah Frye(comptroller), Ian Cochran (operations manager)] 선물로 주고 떠납니다. 그는 자신의 은퇴 후에도 서점이 존속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색하다가 마침내 이 서점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일을 가장 잘해 낼 수 있는 네 사람에게 이 서점을 넘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대신 서점의 이름과 건물을 바꾸지 않기로 합니다. 당시 이 서점은 30,000여 권의 책을 포함해서 거의 밀리언 달러의 가치가 있는 사업체였다고 하니 지금은 더 커졌겠지요. 은퇴를 앞두고 '글로브 엔 메일'신문사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80이 넘으면 깨닫게 될 겁니다. 나 자신이 더 이상 이전까지 내가 알던 내가 아니라는 것을... 그건 아주 천천히 추락하는 것과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자꾸 뭔가를 잊어버리고, 자주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죠. 그래서 나는 ‘손뼉 칠 때’( I want to get out on a high note) 떠나려는 겁니다.


마치 미리 예감이라도 한 듯, 자신의 삶에서 이렇게 멋진 앤딩을 결심했던 '제임스 먼로'는 2년 후에 영면하셨습니다.



짐 먼로와 이혼을 하고 온타리오 주의 클린튼 Clinton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를 해서 살던 엘리스는 노벨 문학상을 받기 1년쯤 전에 Dear Life라는 단편소설집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이유는, 이젠 그만 쉬고 싶다, 였습니다. 그리고 정작 노벨문학상이 확정되었을 땐, 연락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따님이 전화로 소식을 전합니다. 그녀는 시상식에도 노구라 못 가겠다면서 따님을 대신 보내고 인터뷰도 많이 사양했습니다. 개인적인 기쁨과 영광이기도 하지만 캐나다로도 첫 노벨문학상 수상이었는데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하게 지나갔습니다.


엘리스 먼로의 책들


단편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 역사상 엘리스 먼로가 처음입니다. 한국은 단편 소설이 강세인 나라지만 서구에선 좀 다릅니다. 이윤기 선생님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외국의 어느 모임에 갔을 때 소설가라고 소개를 하니까 어느 분이 어떤 장편 소설을 썼는지 물어봤다고 합니다. 장편은 쓴 적이 없다고 하자 아주 단호한 어투로 장편을 쓰지 않았다면 소설가가 아니라고 합니다. 대체로 이런 분위기라 엘리스 먼로께서도 수상 소감으로, 이제 사람들이 단편이 장편을 위한 습작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라고 인정하게 되어 기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소설에는 기발하거나 특별한 주제나 주인공은 거의 없습니다. 그녀의 단편 소설을 여러 편 읽었는데 거의가 그녀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의 이웃들의 이야기였습니다.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소한 사건과 감정들 속에서 각자가 겪는 내면적 갈등을 섬세하고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때론 다소 미진하고 허탈하게 끝나는 단편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열린 결말'이라고 하기엔 그리 희망적이지도 않고 착잡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단편을 여러 편 읽다 보면 마치 모든 작품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착각이 들고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던 마음이 쉽게 접힙니다.


그래... 삶에 늘 정답이 있고 모든 일이 다 해결되거나 명확한 결말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진함 위로 또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각자의 방식으로 애를 쓰며 살아가는 거니까...


소설은 끝났는데 소설 밖의 내 현실에 대입되는 생각은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영원히 반복될 우리들 삶의 화두를 소설의 결말에 슬며시 내려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마지막 소설집의 제목, Dear Life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삶이라는 긴 문장의 마침표는 죽음이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잘 살아간다는 것은 잘 죽어간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자연적이든 질병으로든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녀의 책 제목만으로도 생각은 슬그머니 겸손의 자리에 가 앉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마침표는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시간에 대한 존중과 감사여야 한다는, 뻔하지만 뭉클한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감사보다도 존중에 방점을 찍으며 그녀의 책 제목을 떠올립니다. 생각은 이내 확장되어 오늘 아침에 새로 받은 '하루'가 시시하거나 만만한, 그저 그런 날이 아님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수긍하면서, 내 삶의 마지막에 나에게 주고 싶은 인사말, 오늘도 이 말로 시작합니다.


Dea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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