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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Dec 29. 2023

생존율 1%

새해는 마트료시카처럼 온다



꽤 오래전 어느  8월,

칠리왁Chilliwack이라는 작은 도시의 한 도로는 두꺼비 새끼들(toadlets)로 가득했다는 뉴스가 있었어. 올챙이 시절을 벗어난 새끼 두꺼비들은 크기가 '페니'만 하다고 하니 1원짜리 동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매년 이 새끼 두꺼비들은 태어난 습지를 벗어나서 숲으로 이동을 하는데 워낙 작다 보니 속도가 무척 느린 편이래.

 

그런데 그해 여름엔, 800,000마리나 되는 이 느림보 새끼 두꺼비들이 하필 칠리왁의 분주한 도로 두 개를 건너가게 되었다는 거야. 그러니 가만 놔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잖아. 그래서 착하고 부지런한 600여 명의 사람들이 새끼 두꺼비들을 양동이에 담아 20,000 마리쯤 숲으로 날랐다네.


두꺼비 새끼들 중에서 제대로 성장하는 두꺼비의 수는 단 1%밖에 안된다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전멸할 수도 있어서 이 지역이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리고 두꺼비 입장에서도 천적에게 먹혀서 생태계의 순리대로 장렬히 전사해야 조상 볼 낯이 있지 전혀 '안 내추럴'한 차바퀴에 납작하게 눌려 옆구리가 터진다면 그야말로 객사 아니겠어? 어쨌든 그 사람들 좋은 일 했네..라며 신문을 덮었는데,


그랬는데 말이야.


생존율 1%라는 말이, 생각 없이 삼킨 삶은 달걀 한 입처럼 목에 턱 걸려서 급체한 기분이 들더라. 날 때부터 팔자의 윗자리로 배정받은 억세게 운 좋은 녀석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기를 쓰고 숲이라는 희망을 향해 움직이는 새끼 두꺼비들이 측은하다가, 곧 두꺼비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알아챘어.

 

꿈 혹은 기대라고도 부르는 내 것의 생존율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1%의 생존율을 위해서 99%의 방향감각 둔한 헛발질을 하며 살아온 것만 같았어. 게다가 이젠 간신히 숲일까 싶었는데 갑자기 질질 끌려 와 다시 늪지에 던져진 건 또 얼마나 여러 번이었는지 말해 뭐 해. 그럴 때마다 대책 없이 막막하지. 다시 숲을 향해 출발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기엔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더구나  말이지. 그 생존율 1%마저 사사오입 같은 터무니없는 긍정이었단 생각이 드는 거야. 하지만,


가끔은 바닥으로 쏟아진 의욕들을 짧은 손톱으로 긁어모아야 할 때도 있고, 왜 내 삶의 옆자리엔 늘 실망과 좌절이 앉아있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멈출 순 없을 것 같아. 숲속에 약속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기가 숲이기 때문에 무작정 가는 어린 두꺼비들처럼.


벌써 올해도 몇 날 남지 않았어. 언제부턴가 습관적으로 '벌써'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완성되는 문장이 있다는 건 모른척하기로 해. 곧 새해잖아. 같은 날의 반복이고, 단지 숫자로 그은 평평한 금을 넘을 뿐이지만 늘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에겐 아직도 손금처럼 은밀하게 남아있는 소망이 있기 때문일 거야.


삶은, 마트료시카(matryoshka doll)를 닮았어. 하나를 열 때마다 똑같이 생긴, 하지만 점점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되풀이되지. 하지만 설령 부피는 줄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축소만이 아니 응축된 삶의 질료라 믿으며,


나의 새해에게

그리고 당신의 새해에게도

낡은 손을 내밀어 인사하려고 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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