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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l 18. 2022

꿈에도 유통 기한이 있을까?

낡은 편지 상자를 열고



오랜만에 너의 메일을 받고 갑자기 감정의 물꼬가 트인 것처럼 네 편지의 두 배쯤 되는 길이의 답장을 쓰면서, 결국 이 편지의 수취인이 나이기도 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낀다. 그리고 클릭 한 번으로 불과 몇 초 후에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지금은 좋다. 쉽게 이동할 수 없는 물리적인 거리도 축지법을 쓰듯 순간 이동으로 편지를 배달해 주는 세상이지만 '이 메일'을 편지라고 하지 않고 굳이 '메일'이라고 구분해서 부르는 이유는, '편지'라는 단어는 항상 먼 향수 같은 아날로그 감성을 데려오기 때문일 거야.


편지지를 고르고, 서너 장쯤은 금세 넘어가는 긴 편지를 쓰고, 삐뚤어질까 조심스레 우표를 붙이고, 빨간 우체통까지 봄바람처럼 살랑대며 걸어가, 바르르 한 설렘으로 편지를 떨구던, 그리고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답장을 기다리던 그런 시절은 이제 봉인된 추억이 되었지만, 마치 암모나이트의 화석을 발견한 기분으로 깊숙이 넣어 둔 낡은 신발 상자를 하나 꺼낸다. 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처음 받았을 때의 그리움과 설렘은 여전히 갈피마다 스며있었다. 잠깐 무엇인가 뭉근하게 늑골 쪽을 누르고 지나가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어. 아직도 그 시절이 너무나 생생하다,라고. 하지만 잊힌 건 아무것도 없구나.


상자 하나를 꽉 채운 편지들, 살아오는 동안 정리하고 버린 물건들이 꽤 있었지만 네가 보낸 편지들은 한 장도 흘리지 않고 다 데리고 다니며 세월을 건너왔나 봐. 네 편지들을 보니 문득, 내기 보낸 편지들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지만 네게 묻지는 않을 거야. 혹시 대답하기 난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백지 앞에만 앉으면 쓰고 싶은 말들이 넘쳐서 또박또박 서 내려가는 손글씨의 속도보다 마음이 먼저 다음 장에 가 앉아서 기다리던 시절, 글만으론 뭔가 아쉬워서 여백에 그렸던 그림들은 또 얼마나 정성스러웠니. 시간이 이만큼이나 매정하게 흘렀는데도 낡은 편지 속에 있는 너나, 그걸 읽던 그때의 나나 어쩌면 이렇게 변하지 않았는지. 그토록 많은 시간과 상처와 고독을 지나왔는데도 말이야.


나는 너무 많이 변했어.


몇 년 만에 네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알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거의 하지 못했다는 걸. 그래서 얼마 후 내가 다시 전화했을 때, 감기에 꽉 잡힌 목소리로 너는 말했지. 나는 너무 많이 변했어. 하지만 난 알아. 넌 변하지 않았다는 걸. 네가 말하는 변화가 외모나 성격이나 말투 같은 것이 아니란 것도 말이야. 사실 그런 거라면 아예 딴 사람이 된 건 바로 나일 테니까. 하지만 나도 변하지 않았어. 단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 불충분'일뿐. 그러니, 사는 게 다 그렇지 뭐,라는 체념 속에 묻어 둔 꿈의 안부를 걱정하진 말자. 꿈이란 원래 삶이 지난할수록, 가지니 것이 턱없이 모자랄수록 더 질긴 생명력을 갖는 속성이 있으니까.

 

내 삶에서 전부일 수는 없지만 결코 그냥 지나쳐 갈 수는 없는 꿈의 영토가 그리워 앓을 때면, 어쩌면 내 능력으론 이룰 수 없는 꿈일지 모르지만 끝내 버리지 못한 그것을 향한 의지에 새살이 돋는 걸 느낄 때도 있었어. 소름 돋듯 찾아오는 이 느낌만으로도 삶은 오롯이 새로워지기도 하지. 갑자기 마음이 미세하게 들뜨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건 불안이겠지. 혹시 이 삶이 내게 주고 싶은 것이 아직 남아 있는데 내가 너무 일찍 꿈을 위해 싸우기를 포기한 건 아닌가, 해서.


누구에게나 삶의 행복, 혹은 만족을 정면으로 만나기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야.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나만을 위한 암호 같은 것, 내가 만들어 놓고 내가 풀 수 없는 그 암호를 스스로 포기하진 말자. 하지만 목표에 집착하거나 결과를 미리 짐작하며 서툰 희망이나 이른 절망을 가질 필요도 없는 거야. 길을 걸을 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느라 그 길 곳곳에 들꽃처럼 숨어있는 사소한 경이를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목적지를 정하고, 거기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절대 만족할 수는 없을 테니까. 네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함부로 마음을 거뒀던 꿈의 지표들이 하나씩 길 위에 다시 세워지는 것 같았어.  그 이정표들이 설령 신기루라 해도 아무것도 없는 길을 무작정 가는 것보다는 안심이 될 것 같기도 해.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자주, 생각해.


혹시 내 꿈 위에 뿌려대고 있는 것이 방부제는 아닐까. 발효될 수 없는 꿈의 발효를 기다리며 무의미한 연장을 위해 방부제를 뿌리는 중이라면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새 시간은 도대체 어떤 누더기를 걸치고 나를 찾아올까. 꿈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이 삶을 다치지 않고 욕심낼 수 있었던 것이 이것 말고 또 있을까.


해서, 나는 오늘도

유통기한이 지났을지도 모를 방부제 든 빵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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