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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17. 2023

나만의 방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



세월이 빠르다는 말에 긍정과 부정의 구분을 명확히 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아이들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지나고 나면 어느새 저렇게 훌쩍 컸나 싶다가도 육아 때의 고단함과 그 파란만장한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면 결코 그 세월이 짧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소중하게 모아놓고도 언제부턴가 잊고 살았던 아이들의 어릴 적 그림이나 글을 다시 보며 그 속에 압화처럼 끼워져 있는 젊은 엄마인 나를 만나면 세월이 무정하리만치 빨리 지나갔음에 허망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마치 스토리텔링을 하듯 꼼꼼하게 이어지는 사진들을 볼 때와 다른 감흥에 젖는다. 어린 아이들의 그림속에는 숨겨진 언어들이 있다.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내가 쓴 육아 일기에 남아있듯,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아이들의 그림속에 숨어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나를 위로하는 추억들, 시간이 세공한 보석이다. 그리고 가끔은,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새삼스레 지금 내가 알고있는 언어로 삶을 새롭게 들추기도 한다. 



아이가 몇 살 때 나만의 방을 갖고 싶어 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일곱 살에서 여덟 살로 넘어가던 무렵이지 싶다. 하지만 스크랩북에 정리를 할 때는 무심하게 넘겼는데 나중에 우연히 다시 이 그림을 봤을 때, 어쩌면 아이는 채 다섯 살도 되지 않았던 이때에 벌써 나만의 방을 갖고 싶어 한 건 아니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아이는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는 작은 방 두 개중의 하나는 놀이방으로 쓰고 좀 더 큰 방에서 언니와 함께 잤었다. 연년생이라 늘 같이 놀고 거의 모든 것을 함께 하니 이런 방 배치는 별 고민 없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안된다고 할 이유도 없어서 연년생인 두 아이는 각자의 방을 갖게 되었다.


Jan,15,1999. Hayoon, age 4


아마 아이는 네 살 때 그렸던 이 그림처럼 분홍색 벽과 무지개 색깔의 러그와 예쁜 내 옷만 가득 걸린 옷장과 프레임이 예쁜 침대와 폼나는 티 테이블을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새로 페인트를 칠하진 않아서 벽은 흰색이었고,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마젠타 핑크색 작은 담요를 러그 대신 깔았고, 늘 입던 옷들을 걸어둔 붙박이 옷장과 아빠가 나무로 만들어서 튼튼하긴 하지만 특별히 예쁠 것도 없는 침대와 책상이 전부였다. 그래도 꼬리 예쁜 햇살이 길게 들고 밤이면 별과 달이 가장 잘 보이는 창문이 있는 방이었다. 아이는 아직도 그 방 창으로 보던 밤하늘에 대해 이야기하는, 달을 사랑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 집에서 십 년을 살고,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기 전에 집수리를 하는 동안에 아이는 날마다 다짐을 받았다. 언제나 가장 작은 방에서 살았던 한(?)을 풀어야겠으니 방과 널찍한 거실까지 달린 베이스먼트를 통째로 다 달라고 했다. 내가 가게를 접고 홈비즈니스로 미술 재료상을 할 때라 베이스먼트는 미술재료와 책장만 들여놓을 예정이라서 남는 방 하나와 거실은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이사를 하자 다시 또 가장 작은 방에 자기 짐을 풀었다. 아무래도 너무 크고 무서울 것 같다고... 대신, 제 방의 벽은 분홍색으로 칠해 주세요.


흰색이 많이 들어간 연분홍 벽에 하얀 순면 레이스 커튼을 달아주고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라 작은 컴포넌트 오디오도 하나 들였다. 분홍색은 마음을 행복하게 만드는 색이라더니 햇살이 가득 차면 뽀얀 분통 속 같은 아이의 방은, 지나가다 슬쩍 들여다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아이는 다시,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 조금 더 많아진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


연년생이면서도 아가 때부터 늘 동생을 챙겼던 큰 아이는, 스스로 정해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한두 가지를 제외한 일상적인 것에는 무조건 동생한테 맞춰주는 편이었다. 동생 덕분에 덩달아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는데도 평소처럼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방을 갖게 된 후로 문을 닫고 있을 때가 많아졌고, 하윤은 노크를 하고 허락을 받아야만 그 방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가끔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아직 언니와 노는 게 가장 좋았던 하윤은 살짝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자신만의 방을 원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혹은 자신의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선 책임지거나 포기해야 하는 게 있기 마련이란 걸 어렴풋이 배웠을지도 모른다.(아마 이건 내 바람일 뿐.) 어쩌면 두 아이의 성향이 갈라진 건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춘기를 통과하면서 인생 동지였던 과거를 배신한, 너무 다른 두 인격체의 중간에서 당황하던 나는 큰 아이, 지윤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겨우 14개월 차인데 그래도 언니라고 무조건 동생에게 맞춰주느라 힘들었던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어쨌든 자기만의 방을 가진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기만의 것들을 꿈꾸고 때론 좌절하고 슬퍼하다 다시 꿈을 꾸면서 어른이 되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 이라는 글귀를 읽으면 바로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것이다. 공정과 공평을 혼동하는 아직 서툴고 편협한 페미니즘의 큰 목소리에 동의할 수 없었을 때, 그녀의 '자기만의 방'은 내 불편한 심기의 근원을 정의 내려 주었다.


사실 그녀를 처음 안 건 그녀의 글이 아니라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시는 다 외워버리고 말겠다는 듯, 시를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외워야 흡족했던 중고등학생 때, 목마와 숙녀는 단골 암송 시였다. 박인환, 박인희, 이해인 수녀님을 근거 없이 세트로 묶어서 좋아하던 시절이다. 박인환의 시에 나오는 목마, 숙녀, 별, 정원, 한잔의 술과 동격으로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저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발음하는 게 좋았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난 후에서야 그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이가 어른이 된 후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영화 The Hours를 같이 본 적도 있지만 아이는 버지니아 울프를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녀의 우울과 신경증이 조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녀가 주목하며 이렇게 표현했던 작가, '미움 없이, 쓰라림 없이, 두려움 없이, 항의 없이, 설교 없이' 글을 쓴 제인 오스틴을 무척 좋아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아이 덕분에 뒤늦게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고, 소설 원작의 영화를 몇 편 찾아보고 결국 '비커밍 제인'은 기억에 남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제인 오스틴이 -- 페미니즘은 남성이나 여성의 대립에서 획득해야 하는 평등이 아니라 두 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제3의 무엇이라는-- 결국은 같은 생각을 다른 색깔의 글로 썼듯이 우리도 같은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면서도 서로 통한다. 모녀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유희이자 특권이라고 말한다면 어디선가 야유하는 소리가 들릴 것도 같지만 깔끔하게 무시하련다.


시대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작가에게 강조했던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녀가 말한 이 두 가지는 단순히 '돈'과 '공간'의 의미만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고 유머를 잃지 않는 활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라는 충고다. 이건 비단 작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스스로 흡족할 만큼 제대로 실천하며 살진 못해서 아쉬움이 남지만 다행히 아이는 나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고, 살아갈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아이가 앞으로도 늘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잘 지키며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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