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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Dec 12. 2023

아끼던 그릇을 깼다.

가장 좋은 그릇에 담는 마음


오랫동안 아끼며 사용한, 다섯 개가 세트로 된 그릇의 마지막 한 개가 드디어(?) 깨졌습니다. 왕창 깨진 건 아니고 설거지하다 부딪쳐서 테두리가 깨졌는데 작은 조각이 날카롭게 떨어져 나가서 더 쓸 수는 없었어요. 18년쯤 쓴 그릇이니 새삼 아까울 것까진 없는데도 제 부주의가 원망스럽더군요. 물건을 잘 망가뜨리지 않고 오래 쓰는 편인데... 아쉬워하며 깨진 그릇을 버리다가 아주 오래전에 썼던 글이 떠올라서 글창고를 뒤져 조금 다듬어 거풍 시킵니다.




예전에 즐겨 보던 TV show 중에 ‘초원의 집’이란 외화가 있었다. 그때 보았던 많은 에피소드 중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은 그릇에 관한 이야기다.


드라마의 배경이 된 시기의 평범한 사람들이 거의 그랬듯이 그들의 주방식기들은 캠핑용품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내는 진짜 도자기로 된 접시를 갖고 싶지만 가난한 생활이라 그건 그저 꿈일 뿐이다. 평소에 아내의 소원을 잘 알고 있던 남편은 어느 날 동네에서 가장 부잣집의 허드렛일을 해준다. 자신의 농사일만으로도 바쁘고 힘든데 그 일을 하는 이유는 품삯으로 도자기 그릇세트를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약속한 일을 다 끝낸 남편은 대가로 받은 그릇들을 싣고 와 부엌에 풀어놓는다. 식탁 위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그릇들을 어루만지며 아내는 너무 좋아한다. 아내는, 이 그릇들은 아주 귀한 사람들과 식사할 때 쓰겠노라면 찬장 안에 조심스레 보관한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 식구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 식탁 위엔 늘 먹는 소박한 음식들이 그 도자기 그릇에 담겨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귀한 사람이 올 때 쓸 거라고 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족이야. 그래서 엄마는 날마다 이 그릇을 쓸 거란다.


어릴 때 우리 엄마도 예쁜 그릇을 꽤 많이 갖고 계셨다. 하지만 엄마는 그 그릇들을 유리문으로 된 그릇장에 보관했다가 특별한 이름이 붙은 날이나 손님이 왔을 때만 잠깐씩 꺼내 쓰곤 했다. 아마 그 시절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랬을 것이다. 지금처럼 물건이 흔하지도 않았고, 일상에서 늘 사용하지 않는 비싼 그릇은 일종의 사치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단지 과시용이 아니라, 좋은 것을 아껴두었다가 정말 특별한 날 꺼내서 대접하는 마음도 나름 곱다고 생각하므로 그 시절의 엄마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드라마를 보던 날, 그릇에 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었다.


만약 내가 어른이 되어서 결혼을 하고 나만의 부엌살림을 갖게 되면, 날마다 식구들을 위해 가장 귀하고 예쁜 그릇을 쓰겠다고. 설령 김치 한 포기, 구운 생선 한토막, 콩나물무침 하나가 전부인 조촐한 식탁일지라도 찬장에 좋은 그릇을 모셔두고 내 식구들에게 아무 애착 없이 왈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해도 되는 그런 그릇으로 밥상을 차리진 않으리라고.


그동안 그릇에 대한 나 자신과의 약속은 잘 지키며 살았다. 그릇이 많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가장 애착이 가고 가장 보기 좋은 그릇에 식구들의 음식을 담았다. 어쩌면 내가 아주 비싼 그릇을 갖지 못해서 그게 쉬웠을 수도 있겠다. 그러다 가족 구성원이 늘어나고 살림의 햇수가 쌓이니까 그런대로 넉넉했던 그릇들의 개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가 빠져서 화분 받침이 되기도 하고, 실금이 간 컵은 연필꽂이나 동전을 모아두는 통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설거지하다가 혹은 이사를 다니다 깨기도 하고, 새로운 용도의 그릇이 필요한 일도 생겼다. 아무래도 그릇을 조금 사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어느 추수감사절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밖에서야 여러 번 만났지만 댁으로는 처음 가는 터라 흔한 과일이나 케잌으론 부족한 듯해서 선물을 궁리하다가 한 그릇가게가 떠올랐다. 작은 일본 도자기 그릇가게였는데 소유의 욕심 이전에 아름다운 것을 만났을 때의 즐거움으로 만난 가게였다, 하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고 지나갈 때마다 잠깐씩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마침 세일 중이었다. 평소의 가격이었으면 선물만 사서 나왔을 텐데 50%나 디스카운트를 하니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서 내 몫으로도 한 세트를 샀다.


선물로는 장미꽃무늬가 고운, 정말 장미꽃잎만큼의 무게밖에 안 나가는 커피잔 세트를 사고, 내 몫으론 약간 넓적해서 용도가 분명하진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다섯 개짜리 그릇세트를 샀다.


아이들은 각각 색깔이 다른 그릇들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의 그릇을 골라 시리얼도 타서 먹고, 볶음밥도 담아먹고, 카레밥도 비벼먹었다. 반찬이 많은 날은 다섯 개를 모두 반찬 그릇으로 쓰기도 했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그릇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음식 맛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거지를 할 때면 조금 불편할 만큼 조심하게 되고, 어쩌다 아이들이 비스킷이라도 담아서 가져가는 걸 보면 혹시 깨뜨릴까 신경이 쓰여서 말은 안 해도 다른 그릇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어디선가 타전되는 경고음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소유가 주는 구속이구나. 사소한 그릇 하나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면 내가 감히 어떻게 자유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릇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내가 아무리 그 그릇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릇 원래의 용도를 벗어난 걱정을 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 분명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위해서 음식을 담아 먹기 때문에 이 그릇들이 아름답고 중요해진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다.


문득 ‘초원의 집’이 떠올랐다. 그제야 그 한 편의 드라마가 내게 말해준 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그릇에 밥을 담아 먹이고 싶은 엄마나 아내의 마음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 마음이 발을 헛디뎠을 때 걸음을 다시 고치게 하는,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조용한 혜안이었다. 살면서 허영심이나 과시욕에 마음이 어두워져서 제 용도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 어찌 비싼 그릇뿐이겠는가.


이제는 식구들이 이 그릇을 어떻게 사용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 그릇들을 조심스레 다루며 설거지를 한다. 그릇이 깨지면 아까워서가 아니라 내 가족들이 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으며 느끼는 소박한 즐거움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시 포스팅을 할 줄 알았으면 깨진 마지막 그릇을 버리기 전에 사진이라도 찍어놓았을 텐데... 글을 쓸 때 제가 찍은 사진을 물증(?)으로 남겨야 글의 마침표를 찍는 것 같은 습관 때문에 기어이 오래전 블로그에 사용한 사진들을 뒤져보니 한쪽 귀퉁이가 살짝 나온 다른 색깔의 그릇이 두 개 있었어요. 빙고! :) 다섯 개 모두 색깔이 각각 달라서 이렇게 음식과 색깔을 맞추어서 담는 재미도 있었다는 게 새삼 떠올라서 미소 짓습니다. 어묵볶음은 연한 분홍색, 블루베리로 색을 내 빚었던 송편은 보라색 그릇에 담았네요. 사진은 없지만 나머지는 똑같은 톤으로 아주 연한 파랑, 노랑, 연둣빛이었습니다.


어묵볶음은 분홍색 그릇에
블루베리를 끓인 물로 색을 입혀 빚었던 송편은 보라색 그릇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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