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는 아까워.
겨울 우기가 끝나고, 말수 적던 땅에서 새순이 자라면서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은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들켜지지 않는 설렘입니다. 그렇게 언 땅이 부풀듯 몸과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걸 느끼면서 봄을 따라다니게 되지요.
그러다 오월쯤 들어서면 마치 '어느 날 갑자기'처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은 자태를 드러내며 각자 다른 결의 이야기를 만들며 풍만해지죠. 이때부터 여름 내내, 이른 아침 산책길이 유난히 아름답습니다. 보기 좋은 물건에는 이성적인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엔 그저 감탄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기도 하죠.
저희 집은 큰 도로 근처에 있는 고층 콘도의 26층입니다. 하지만 걸어서 10분 정도만 가면 아주 다른 풍경 속으로 들어섭니다. 오래된 주택가의 각각 다른 아담한 정원이나 가꿔지지 않은 뒷길도 매력적이고, 어느 쪽으로 가든 넓은 잔디밭이나 공원, 그리고 숲도 있습니다. 얼굴을 맞대는 맑은 공기와 깔끔한 바람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 하지만 꽤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지난 일 년여 동안은 내가 잊고 살았던 고맙고 소중한 것들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두 다 헌터 덕분이죠. 우리는 날마다 이른 아침에 긴 산책을 하거든요.
아, 헌터는 작년 유월에 한국에서 왔습니다. 개농장에서 구조되어 보호소에서 있다가 그 보호소가 폐쇄되기 직전이라는 소식을 듣고 데려와 임시보호를 하던 '진도 믹스' 강아지인데, 우여곡절(?) 끝에, 임시보호 8개월째인 지난 2월에 결국 저희가 입양을 했습니다. 임시보호가 너무 길어져서 이젠 무엇보다도 안정된 환경을 지속시켜 주는 게 헌터에게 가장 좋은 일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른 아침마다 산책을 나갑니다. 표면적으론 헌터를 위한 것이지만 사실은 저와 아이가 득을 많이 봤습니다. 건강이 좋아진 건 물론이고, 꽤 오래 소중한 줄 모르고 살았던 내 주변의 자연이 풀어내는 순하고 다정한 것들을 다시 경험하며 많은 즐거움과 위로를 받습니다.
유명한 관광지를 정작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 것처럼 일상에 배치된 자연의 아름다움은 놓치기 쉽습니다. 일상의 반복적인 고단함이 마음의 시선을 다른 곳을 향하게 하기 때문이죠. 오랫동안 사람들과 부대끼며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들에 대한 반 작용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엔 날마다 하루가 새롭습니다. 없던 것이 새롭게 생긴 것도 아니고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가치를 제대로 아껴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눈길 닿는 풍경에게, 숨을 한껏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와 바람에게, 이래본적이 참 오래 된 것같은 순수한 고마움을 내밉니다. 이렇게 무심하고 서툴게 잃었던 마음이 어디 자연에 대해서뿐일까 싶은 심정을 들키기도 하면서요.
굳이 숲이나 공원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아침 산책길에서 만나는 동네 구석구석의 꽃과 나무들만으로도 수목원을 걷는 기분이지만 요즘 들어 즐거움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꽃 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들 덕분입니다. 저는 아름다운 꽃들로 가꿔진 정원이나 멋진 나무보다는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푸성귀가 있는 텃밭과 과실이 열리는 나무들을 더 좋아합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어여쁜 것들이 먹거리까지 제공하니 너무 기특하잖아요.
담장을 넘어 골목길까지 휘어진 가지에 열린 먹음직스러운 무화과나 아름답기 그지없는 포도나무의 그늘이나 연둣빛 포도송이를 보면 너무 부러워서 남의 집 담장 앞에 잠시 서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희에겐 '쪼끔 달고 많이 신' 야생 사과나무 세 그루와 맘껏 따와도 괜찮은 열매가 있거든요.
바로 블랙베리(blackberry)입니다.
블랙베리는 번식력이 좋아선지 동네에서도 흔하게 볼 수도 있고 대체로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곳은 담장처럼 길고 넓게 이어진 곳도 있고요. 하지만 억센 가시가 굉장히 많아서 안쪽의 베리는 딸 수가 없습니다. 그건 날개 있는 녀석들이 따먹겠죠. 하지만 누구의 손길도 타지 않고 저 혼자 익고 떨어지는 블랙베리들이 훨씬 많습니다. 아마 가시 때문에 따기 수월하지 않고,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서겠죠. 마켓에서 작은 플라스틱 통에 든 블랙베리를 비싸게 사 먹으면서도 정작 직접 따러 가는 사람들은 드물 테니까요.
우리도 블랙베리를 따러 가는 게 아니라 산책하다 눈에 보이고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만 따오거든요. 그때마다 두 손을 오므려 담길 만큼 땁니다. 워낙 열매가 많다 보니 익어가는 속도가 달라서 까맣게 잘 익은 것만 골라 따는 동작만으로도 꽤 큰 즐거움입니다. 게다가 다른 날 지나가다 보면 또 딸만큼 익은 것이 있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운지요. 가끔 다른 곳으로 걷다가 며칠 만에 이전에 블랙베리를 땄던 곳으로 가게 되면 그동안 블랙베리가 많이 익었겠다며 은근히 기대를 하지만 오히려 허당일 때도 있습니다. 글쎄, 블랙베리 익어가길 기다리는 게 어디 우리뿐이겠냐고요.
오래전에 제가 알던 어떤 한국분은 매년 블랙베리를 따러 가셨습니다. 거의 대규모 수확이라 할 만큼 열심히 따러 다니셨는데. 장화를 신고 장갑도 끼고 잠자리 채 같은 걸 만들어 깊은 안쪽에 있는 걸 딴다고 하셔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로 담금주를 만들어서 지하실에 저장해 두었다가 크리스마스 때면 와인을 선물하듯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셨습니다. 그때 블랙베리가 한국에서 말하는 '복분자'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때 기억이 나서 저도 흉내를 내 봅니다.
그동안 블랙베리를 따오면 먹고 싶을 만큼만 바로 먹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두었습니다. 땡땡하게 언 블랙베리는 금세 해동이 되고 입안에 넣으면 막 땄을 때보다 부드럽게 녹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매년 농장으로 블루베리 유픽(U-Pick)을 갔기 때문에 거의 일 년 내내 견과류 먹듯 언 블루베리를 먹기도 하고, 와인도 만들었지만 블랙베리로 술을 담그는 건 처음이랍니다. 마침 냉장고에 '귀한' 소주가 한 병 있었습니다. 아이가 와인 대신 생일 선물로 받은 소주입니다. 여기선 소주가 굉장히 비싸거든요. 소주 두 병 값이면 아주 맛있고 품질 좋은 포도주를 한 병 살 수 있습니다.
소주 두 병과 막걸리 한 병을 선물로 받았을 때, 선물을 준 그 친구가 한국에서 소주는, 시골 구멍가게에서도 살 수 있다는 것과 (캐나다는 liquor store라고 부르는 전문 주류 판매소에서만 술을 살 수 있습니다.) 현지 가격을 알면 어떤 표정이 될지 상상하며 아이와 한참 웃었습니다. 어쨌든, 마침 소주도 있으니 블랙베리로 담금주를 만들어 보자! 그런데,
안된답니다, 따님께서.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소주의 저 순수한 투명함을 더럽힐 수 없다나 뭐라나...
세 살 때 이민 온 아이는 대학 때 만난 한인 친구들 덕분에 소주를 알았는데 꽤 좋아합니다. 술을 즐기는 편인 아이는 주로 와인을 마시지만 어떤 공식처럼 어울리는 안주가 있으면 무조건 소주를 외칩니다. 고기를 구워 먹을 때나 어묵탕을 끓일 때나.. 그건 인정.
소주는 술이라기보다는 그냥 알코올에 가깝다는, 술맛 떨어지는 소리나 하는 저도 지금까지 세 번쯤, 맛있게 소주를 마신 기억이 있거든요.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건 명백히 안주빨과 분위기의 합작이었습니다. 제게 소주는 아직도, 술 자체보다는 어울리는 맛있는 안주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분위기 덕분에 맛있는 술이 됩니다.어쨌든 그래서,
귀한 소주는 그대로 모셔두고 언제, 왜, 어떻게, 먹다 남긴 건지 기억도 안 나는 보드카에 블랙베리를 넣었습니다. 마침 술병 입구의 크기가 딱 맞아서 그냥 퐁당퐁당 한 알씩 넣었지요. 사실 담금주를 그리 선호하지도 않아서 재미 삼아 퐁당퐁당... 예쁘잖아요. 아이가 웃으면 참견을 합니다.
과일주는 설탕을 넣어야 하지 않나요?
그건 적포도주 만들 때지. 붉은 포도는 알코올은 아예 안 넣잖아. 뭐 우리끼린데 그냥 대충 흉내만 내보자. 맛있어지면 좋고, 맛없어도 보기 예쁘니까 괜찮아.
이렇게 해서 신선한 블랙베리 담금주 한 병이 생겼습니다. 햇살 닿지 않는 곳에 잘 보관하고 있어요. 맛은 큰 기대 안하지만 오가며 볼때마다 예뻐서 미리 기분이 좋아지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