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unding or Earthing
grounding 혹은 earthing이라는 명칭은, 맨살로 지구의 표면과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잔디밭 위에 누워있거나 맨발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생각한다면 '맨발로 걷기'만한 것은 없을 것 같다.
한 달이 좀 넘었다.
이른 아침, 날마다 맨발로 잔디밭을 걷는다.두어 달쯤 전에 처음 걸었을 땐 바로 감기에 걸려서 고생을 했다. 날씨가 더워지나 싶다가 갑자기 쌀쌀한 날이었는데 하필 올 들어 처음으로 반바지를 입고 산책을 나갔었다.
처음부터 맨발로 걸을 작정을 한 건 아니고 한국에 계신 어느 분께서 하도 성화(?)를 하셔서 헌터가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동안 마른 잔디 위를 10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 바로 감기몸살에 걸려서 일주일을 호되게 앓았다. 그러고도 혼이 덜 났는지 이주쯤 후에 다시 신발을 벗었다.
예전에 마당 넓은 집에서 살 때는 퇴근 후 유난히 피곤하거나 우울할 때 뒷마당 잔디밭을 자주 걸었다. 나는 사람의 오장육부가 발바닥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또한 다리가 너무 피곤할 때, 발바닥에 자극을 주는 것만큼 빠르게 다리 통증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드물 것이다. 아무튼, 그때는 이런저런 구체적인 효능(?)은 생각조차도 못할 때이지만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혼자 맨발로 거닐던 뒷마당의 기억은, 아직도 아득하고 달콤하게 남아있다.
그러니 분명 좋은 걸 아는데 감기 한 번 걸렸다고 포기할 순 없지 않나? 하지만 두 번째도 또 감기에 걸렸다. 꼭 맨발로 걸어서라기보다는 몸의 컨디션이 아슬아슬하다가 맨발로 젖은 잔디밭을 걷자 체온이 좀 내려가서 잠복근무 중이던 감기 바이러스에게 잡혔을 것이다. 이쯤 되면 오기가 생긴다.
칠전팔기까진 아니더라도 나는 고집스러운 '삼세번'의 혈통을 받은 한국인이 아닌가. 그래서 걱정하는 아이의 눈치를 보면서 다시 또 시도했는데 이번엔 예감이 좋았다. 몸이 내 행동에 동의하는 느낌이 들었다. (삼세판은 진리라니까.)
여기는, 본격적으로 맨발로 걷기를 시작한 후에 꽤 자주 갔던 곳이다. 헌터가 좋아하는 개 공원 바로 옆인데 축구장 만한 잔디밭이 두 개나 있다. 아이와 헌터가 계곡 쪽으로 내려가서 노는 동안 나는 맨발로 잔디밭을 걸었다.
이른 새벽에 자동으로 틀어진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너른 잔디밭을 구석구석까지 적셔놓아서 발바닥의 감촉이 싱그럽다. 실제로 그라운딩은 땅에 물기가 있을 때 더 효과적이라 바다가 최고라고 하는데 이 정도로 물이 찰박거리는 상태면 바다 부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걷고 있다 보면 계곡에서 혹은 개공원에 온 친구들과 실컷 놀던 헌터가 돌아온다, 불과 30분 전에 헤어졌는데 마치 이산가족 상봉하듯 신나서 뛰어온다. 그 특유의 빙구 미소를 날리며.
그런데 헌터랑 함께 산책을 하다 보니 편하게 맨발 걷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출근 전 산책이라 시간에 쫓길 때도 있고, 헌터를 위해 날마다 산책 코스를 조금씩 바꾸다 보니 잔디 운동장 쪽으로 안 가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같이 걷다가 각자 헤어져서 나는 잔디밭으로 가고 아이와 헌터는 계속 거리를 걷기로 했는데 헤어진 지 몇 분 되지도 않아서 헌터가 나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며 되돌아오려고 해서 아이가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큰맘 먹고 독립 선언을 했다.
섭섭하지만 이제 헤어져...
나, 따로 걸을 거야.
헌터를 속이려고 나는 산책을 안 가는 척하다 나중에 혼자 집을 나선다.(이러고 나갔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길에서 우연히 만나 이산가족 상봉 쇼를 세 번쯤 했다. ㅎ)
집 근처에 각각 다른 방향으로 세 군데에 넓은 잔디밭이 있는데 이곳저곳 재다가 그중 가장 작고 조용한 곳으로 정해서 아침마다 걷는다. 집에서 나와 15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고 8시까진 거의 아무도 없다. 8시쯤엔 크리스마스 때 선물로 받은 강아지라 이름이 '홀리'라는 멋지고 빠른 보더콜리 한 마리와 아직 통성명을 못한 홀리의 친구가 온다. 잔디밭이 넓어서 서로 방해는 안되지만 그래도 나는 8시 전에 떠나려고 시계를 확인한다.
맨발로 걸은지 30분이 지나면 처음엔 가뿐하던 다리가 좀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욕심내서 45분쯤 걷고 운동화를 신고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맨발로 한 시간을 걸은 적도 있다. 보통 8,500보에서 만보 사이다.
여름이지만 이른 아침은 시원하고 기온이 평소보다 조금 내려간 날은 잔디에 뿌려진 물이 차가워서 발이 시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떠오른 지 얼마 안 된 아침해가 만드는 양지쪽을 좀 걷다가 다시 그늘로 들어와서 걷는다. 올여름에 헌터와 산책하느라 많이 적응되긴 했지만 아직도 직사광선은 무섭다.(햇볕 알러지 있음.) 그리고 무서운 게 또 하나 있다. 이어폰.
이어폰을 끼면 금세 귀가 아파서 사용하지 못한다. 작년부터는 주로 아이와 헌터랑 같이 걸으니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냥 걷는 게 당연하지만 예전에 혼자 걸을 때는 음악을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이내 아무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상태로 고요하게 걷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 속에서 달그락거리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정리가 되는 경험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혼자 걷는 게 좀 지루할 때면, 사람의 목소리 들어가지 않은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걷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어폰을 낄 수 없어서 포기했었는데 맨발로 걷기를 하면서 그게 가능해졌다. 이른 아침의 넓은 운동장에 나 혼자 있으니 이어폰 없이 작게 음악을 틀고 걸을 수 있다.
옆구리에 찬 작은 가방 속의 폰에서 들리는 음악은, 내 곁을 가까이 지나가기 전에는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볼륨이다. 나는 주로, 아니 언제나 쇼팽의 '녹턴'만 듣는다. 청명한 이른 아침인데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녹턴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막 태어난 어린 햇살과 맑은 공기 속에서 바람의 발자국을 따라가듯 젖은 풀 위를 맨발로 걸을 때, 참하게 들리는 녹턴은, 그리 애쓰지 않아도 쓸데없는 생각들은 다 물러나고 뭔가 자꾸 정리가 된다. 마음도, 기억도, 소소한 일상의 불쳔도.
구글에서 earthing이나 grounding을 찾아보면 좋은 점이 수두룩하다. 대충 정리하면 염증과 통증,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혈류와 에너지를 증가시키고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 달 넘게 맨발로 걷기를 하면서 체험한 결과, 거의 믿을만한 효과다.
무엇보다도 수면엔 확실히 도움이 되고 에너지가 생기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왼쪽 어깨가 많이 아파서 꽤 고생했는데 그것도 나아졌고, 의자에 오래 앉아있을 때 오는 다리의 피곤함도 훨씬 덜어지고, 자는 동안 자주 쥐가 나던 증세도 없어졌다.
나는 어떤 유희적인 행동으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가 풀렸다는 표현에 거의 공감을 못했다. 스트레스가 쌓인 원인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이른 아침마다 맨발로 잔디밭을 걸으면서 어렴풋이 알아챈다. 아! 이런 거였구나.
마치 유행처럼 바뀌면서 항간에 떠도는 운동법이나 건강식 같은 것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맨발로 걷기'는 무조건 권하고 싶다. 직립보행인 인간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인 걷기를, 단지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약간의 번거로움만 감수하면 이토록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왜 시도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