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 테라피
지난 금요일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눈이 많이 내렸는데 아직 쌓여있고 기온도 낮아서 생일 전후로 만나기로 한 약속도 취소하고 생일에 아이가 계획했던 것들도 모두 미루고 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좋았지요. 속으로, 때맞춰 눈도 오고 추워진 날씨에게 감사했습니다. 때론 효도(아휴.. 어색한 이 단어. 근데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받는 것도 힘듭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안 가도 되는데 아이의 마음은 또 다르겠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창가의 긴 식탁에 마주 앉아서 따뜻한 집밥을 두 번 먹고, 식탁 아래의 러그 위에 엎드려있는 헌터와도 놀고, 수시로 커피와 차를 끓여 케잌을 먹으며 영화와 예능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고맙게도 아이와는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계속할 얘기와 웃음이 넘칩니다. 다정하고 포근한 하루였어요.
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는 뜨개질을 했습니다.
아이가 인터넷에서 본 장갑 사진을 보여주면서 너무 예쁘다고, 패턴을 $8에 판다고 하길래,
이깟것 뜨는데 무슨 패턴씩이나 필요해. 갖고 싶어?
응. 예쁘잖아.
웬일이야. 색깔 취향이 변했어?
검은 외투나 패딩 입을 때 이런 거 끼면 예뻐.
알았어. 그럼 떠주지 뭐. 안 그래도 담요 뜨고 남은 자투리실 있어서 뭔가 뜨려고 했는데 잘 됐다.
도톰한 게 좋다고 해서 면실을 두 겹으로 합쳐서 떴습니다. 물론 아이가 보여주었던 사진 속의 장갑과는 색깔 배치나 간격은 완전히 다르지요. 갖고 있는 실이 다르니까요. 다 떠놓고 나면 그냥 '예쁘다'지만 같은 계통의 색상이 아니라서 색깔을 배치할 때 꽤 여러 번 망설이게 됩니다. 제가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타입이라.
색을 자주 바꿔사 이음새도 있고 원형으로 뜨기엔 편물이 좀 작다 보니 매끄럽지 않은 곳도 있는데 그것마저도 좋다네요. 실로 뜬 것은 매끈한 것보다 좀 터프(?) 한 걸 좋아하는 아이라 별 신경 안 쓰고 떴습니다. 내 생일에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일이 꽤 즐겁다는 것도 알았어요. 문득 아이들이 어릴 때 생일 파티를 하면 찾아준 친구들에게 Goody bag을 주고받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저도 예쁜 '손모아 장갑'을 한 켤레 떠서 하루 종일 효도잔치(ㅋ)로 저를 많이 웃게 해준 아이에게 답례로 주었습니다. 도톰한 순면사 장갑이라 꼈을 때 촉감도 좋지만 색이 예뻐서 그냥 보기만 해도 즐거워진다네요. 저도 볼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칼라테라피 효과가 충만합니다. 사실 제가 어릴 땐 '벙어리 장갑'이라고 불렀는데 아무 생각없이 쓰던 그 단어가 '손모아 장갑'이라는 예쁜 말로 바뀐걸 이번에 알았습니다. 누군지 처음 이 이름을 생각해 낸 분깨 감사한 마음. :)
이젠 눈도 다 녹고 기온도 영상으로 올라가서 장갑을 끼고 다닐 날씨는 아닌데 손에 땀이 나는 한이 있어도 화요일 출근길에 꼭 끼고 갈 거랍니다. 동료들에게 자랑한다고. 즐거워하는 걸 보니 보람 있네요. 실이 아직 남아서 제 것도 하나 뜨려고 합니다. 실이 모잘랄 것 같기도 해서 저는 한 겹 실로 얄팍하게 뜰 겁니다. 색 배치는 또 달라지겠지요. 자투리실로 뜨는 편물이 이게 매력이지요.
무엇이든 제대로 된 편물을 완성할 순 없을 것 같아서 모아 두었던 자투리 실들, 각각 다른 색상 때문에 선뜻 모아서 뜨기도 쉽지 않아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아이 덕분에 의외의 기쁨을 누립니다. 올 한 해의 제 시간도, 조금씩 모자라거나 허술한 하루하루가 모여서 스스로 흡족할 무엇인가가 되길 바라는 소망, 마음의 선반 위에 가만히 올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