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님께서 만취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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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오래전에 위슬러 올라가는 길인 sea to sky에서 찍은 것인데, USB에 보관된 글과 사진들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맘에 들어서 옮겨왔는데 요즘 날씨와 잘 어울리는 분위기다.
지난 시월에 일주일쯤, 이른 서리가 내리고 바짝 추워서 겨울이 빨리 오나 싶었는데 오히려 12월인 지금까지도 날씨가 순하다. 몇 년 만에, 비 오는 날이 많고 기온도 영상인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상기온이 시작되기 전의 전형적인 밴쿠버 날씨다. 아직 히팅도 틀지 않고 도톰한 면 스웨터와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지낸다. 기척도 없이 비가 내리고 안개도 자주 머무는 회색빛 겨울, 차분하다. 덩달아 마음도 뭉근한 연회색이 된다. 집에만 있기 좋은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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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이른 크리스마스 파티에 갔던 아이는 그야말로 술에 떡이 되어서, 아니, 스스로 술이 되어서 12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요즘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스트레스를 짊어진 달팽이 같길래 핑계 김에 오늘 꽤 마시겠구나 했는데 들어서자마자 하는 말이, 엄마, 나 취했어.. 바로 엎어진다. 문 여는 소리에 자다 깨서 후다닥 뛰어간 헌터도 뭔가 이상한지 꼬리를 흔들면서도 주변을 맴돈다. 그러니까 이 풍경은, '사운드 어브 뮤직'이나 '로마의 휴일'처럼 연말이면 재방영되는 연례행사 중 하나다. 회사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면 꼭 이런다. 술 먹는 방식이 평소와 달라서 그런가, 멀쩡히 좋은 음식과 술을 먹어놓고 데킬라 샷에서 백전백패다. 그런데도 그걸 또 먹자는 대로 먹는 모양이다. 조금 토하길래 긴 머리칼을 잡아줬더니 뭐라 중얼중얼.. 뭐라고? 마미, 알러뷰.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샤워도 못하고 옷만 대충 벗고 침대에 쓰러진다. 내일 침대보 갈아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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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지룸에서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을 넣어둔 트렁크 두 개를 갖고 올라온 지 3주가 지났다. 여전히 거실 한 켠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마치 누군가 막 여행에서 돌아온 집 같다. 시간 많은 내가 꺼내서 장식해도 되겠지만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것들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서 그대로 둔다. 법적으로 성인이 된 건 거의 10년이 되어가지만 어쩐지 이제야 아이가 정말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 뒤에서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고, 때론 제풀에 슬쩍 사라지기도 하는 생활. 고단하고 재미없지만 그래도 그 속엔 흐르는 강물 아래에 숨어있는 사금처럼 반짝거리는 것들도 있단다.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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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한 적은 없다.
당연한 걸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사금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는 건, 이래봬도 삶의 비밀이다. 비밀은 남이 말해주면 시시해진다.
어젯밤엔 난데없이 바닥이 벌떡 일어났는데 오늘은 머리를 숙일 때마다 우주의 운석이 모조리 떨어지는 것 같다더니 늦은 오후쯤 되니 이온 음료 한 통과 끓여준 우동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비로소 인간계로 돌아왔다. 다시는 술을 안 먹는다는, 헌터도 알만한 거짓말을 해서 가소롭다는 듯 바라봤더니 한 마디 추가한다. '이렇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