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시간
저녁 6시 반에 출발하는 비행기였지만 11시쯤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딱히 만날 사람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바로 공항 가는 버스를 탔다. 다행히 호텔이 명동 근처라 바로 앞에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내 햇살을 받으며 가야 한다는 걸 알았고, 한국에서 머문 6개월이 늘 여름 같았으므로 햇살과 더위라면 지겨울 만도 한데, 가득 쏟아지는 햇살을 굳이 피하지 않고 커튼을 친다. 다른 한쪽의 커튼은 너무 멀어서 일어서야만 닿을 수가 있어서 포기한다. 반쪽 짜리 커튼이 막지 못하는 햇살이 무릎과 손등 위에 닿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걸 깨닫고는 이내 알아챈다.
아, 이제야 가을이구나. 이 좋은 날들을 두고 떠나네.
가을은 편애하는 계절이니 아까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지만 뜻밖으로 아쉬운 가을보다 힘들었던 지난여름이 살짝, 그립도록 애틋하다. '그립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지난여름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거친 여름 중에 가장 깊고 길었다. 도망갈 수도 없는 속수무책의 여름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끝나고 나니 나름 기특한 열정과 냉정이 적당한 마음의 자리를 찾아가 있었다. 이만하면 예상과는 달라진, 미리 추측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긴 여행의 끝으론 충분하다.
공항 내의 한진택배에서 삼일 전에 미리 보냈던 가방을 찾아 일찍 부치고 디카페인 라떼와 소금빵을 하나 사서 먹고는 바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조용하게 오래 앉아있을 자리를 찾다가, 게이트 근처에 있는 엔젤리너스에 들어갔다. 따끈한 과일차를 한 잔 사서 앉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픈되어 있어서 집중하거나 오래 앉아있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편하게 구겨져서 혼자 있을 공간이 필요했다.
엔젤리너스는 출구와 마주 보는 벽도 뚫려있는데 약간의 공간 너머로 활주로가 보였다. 그곳으로 나오니 활주로가 보이는 유리벽과 하이그로시로 장식된 엔젤리너스의 벽 사이에 게이트의 대기자용 의자가 대여섯 개 정도만 붙어있는 좁은 공간이 있었다. 찾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조용했고 한쪽은 막힌 벽이라도 반대쪽은 유리벽이라 활주로가 훤히 내다 보여서 답답하지도 않았다.
거기 앉아서 캐리어 위에 랩탑을 펴놓고 지난 글과 사진도 정리하고 멍하게 빈 활주로를 내다보며 이미 나를 지나쳐 간 시간도 되돌아보았다. 일상을 예상하며 왔다가 여행으로 마무리가 된 한국에서의 시간이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를 정리하고 마음을 고쳐먹는 계기가 되어서 잘되었다 싶으면서도 좀 허탈했는데 김해시의 여행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호텔에서 보낸 한 달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운이 좋았다.
사실, 남들이 보기엔 운이 좋은 것처럼 여겨지는 일도 사실은 내색하지 않은 힘듦을 견디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쉽게 '운이 좋았다'라고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운이 좋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이건 좋은 일에서뿐만 아니라 좀 불편하고 마음이 상한 경우에도 해당된다. 실망하거나 난처해지는 걸 반복하기 전에 내가 미처 몰랐던 것을 알게 되어서 더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는 긍정의 의미일 때 윤슬처럼 빛난다. 나는 지난 6개월 동안 여러 번 아름다운 윤슬을 보았다. 특히 김해에서 만난 분들은 늘 온순하고 운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 덕분에 여행에서도 결국에 남는 건 사람인가,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공항은 소속이 묘한 곳이다.
여행을 떠나려고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는 그곳이 아직 내가 사는 곳의 공항이지만 이미 여행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 약간의 설렘과 묘한 긴장감과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은 일상을 부려놓고 사는 홈타운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서 기다릴 때는 아직 여행지의 공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이미 끝나 있다. 그래서 여행을 되돌아보며 사진첩을 정리하듯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시차를 계산하기도 한다.
한때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너무 좋아해서 출간되는 대로 읽은 적이 있는데 그중에 영국의 히드로 공항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쓴 책(a week at the airport)이 있었다. 그때는 조금 실망하면서 읽었는데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항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주는 매력을 알게 된 것도 이번 여행의 즐거운 발견 중 하나다.
비행기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을 지루하고 아깝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젠 일부러 좀 더 일찍 나가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장소 같은 곳에서, 가장 헐렁하고 편한 차림새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오롯한 '나'로 보낼 수 있는 그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