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사랑하기 좋은 곳

봄숲 _ 프로스트 _ 자작나무

by 윤서


다 온 듯 싶던 봄이 더디다.

자연의 순환대로 꼭 오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숲을 걷다.


체감온도로 느끼는 계절은 아직 겨울이어도 조금씩 부풀어 오른 강은 물이 아니라 소리로 흐르고, 느린 걸음일망정 숲의 깊은 곳까지 닿은 햇살은 무심한 듯 다정하다. 마주 오던 찬바람도 빰을 살짝 스치며 비껴간다. 나는 문득, 어릴 때 좋아하던 색색의 드롭프스가 그려진 통에서 연두색 사탕을 하나 꺼내 입속에 넣던 기억을 떠올린다. 환절기를 앓던 마음이 잠시 일어나 앉는다. 비록 눈으로 알아챌 수 있는 변화는 적지만 봄이 숲 속에 가득 차 있음을 느낀다.


낡고 익숙한 지도에 그려진 동선을 따라가듯 걷는 아침 산책길, 겨울의 가시거리에서 벗어나 있던 낯선 풍경이 언뜻 눈에 띈다. 좁은 샛길이 보인다. 가늘고 낮은 맨 가지로 겨울을 나던 어린 나무들이 새순을 키우는 중이다. 게다가 조금씩 꼬리가 길어지는 봄볕을 끌어다 만든 땅그림자는 또 얼마나 예쁜지, 그 풍경 속에 발을 넣는 게 미안했지만 맨살로 추위를 견딘 사랑스러운 어린 숲길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


다시, 숲을 걷다.


처음엔 제법 운치 있고 조신하던 숲길이 점점 지워지더니 길이 사라졌다는 신호처럼 좁은 개울이 나타난다. 조금 망설이다 신발을 약간 적시며 물을 건너고 나뭇가지들을 헤쳐가며 더 걷다보니 얼굴에 거미줄이 스치기도 하고 손등이 잔 가지에 긁히기도 한다. 갑자기 그의 시가 떠오른다. 로버트 프로스트자작나무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나도 한때는 백화 나무를 타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걱정에 지치고
인생이 길 없는 숲 속을 걷는 것 같을 때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화끈거리고 간지러울 때
내 눈 하나가 작은 나무 가지에 긁혀 눈물이 흐를 때,
나는 잠시 세상을 떠났다가 돌아와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운명이 나를 오해하고 내 소원을 반만 들어주어
나를 데려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사랑하기 좋은 곳입니다.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샛길을 마치 길 잃은 사람처럼 걷다가 되돌아와서 다시 내가 늘 걷던 깊은 숲으로 들어선다. 몸은 이내 평상심을 되찾지만, 일탈처럼 잠깐 헤매다 온 그 어린 숲길의 달큰한 향기는 사소한 비밀을 남긴다.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채소가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듯이 저 혼자 알아서 피고 지는 것 같은 들꽃이나 함부로 웃자라는 풀, 묵묵한 나무 한 그루의 무수하게 팔랑거리는 이파리들 모두 다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니다. 햇살이 쓰다듬어 주는 만큼, 바람이 속내를 들어주는 만큼, 단비가 흠뻑 안아주는 만큼, 시간이 기다려주는 만큼 꼭 그만큼씩, 돋아나고 꽃피고 물든다.


사람살이도 별로 다르지 않다. 내가 살려내는 시간과 노력만이 나를 만들어 가고, 무사한 내 하루는 확인하지 못한 누군가의 염려와 관심덕분일 수도 있다.


숲을 걷다 보면 가끔 저절로 쓰러진 나무들을 보게된다. 몸체로 봐서는 튼튼하고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언제까지나 꿋꿋하게 서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나무들은 의외로 뿌리가 얕다. 비가 많이 오는 곳이라서 뿌리를 깊이 내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한때는 일종의 신념이자 위로였던, 고난이 삶을 견고하게 만든다는 걸 숲에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처음에 집 근처의 숲을 걷기 시작했을 때는 신체적인 건강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숲에 익숙해질수록 몸보다 마음이 더 의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숲은, 세상과 사람에 지쳐 터덜거리며 찾아온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인간으로서의 예의나 절대 긍정을 떠올리게 했다. 그럴때마다 프로스트의 시, 한 구절을 중얼거린다.


이 세상은 사랑하기 좋은 곳입니다.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숲을 나오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 놓여있는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있다. 아마 나는 저 속에서 다시 또 지치고, 아프고, 후회하며 울음을 참은만큼 웃으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허물거나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들의 경계를 분별하는 혜안이 조금쯤은 생긴 것도 같아서 마음이 순해진다. 숲의 치유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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