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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04. 2023

우리 친해질 수 있을까?

2022 10 07, 임시보호 4개월차, 헌터와의 첫 만남



저녁 6시 반에 출발하는 비행기였지만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만날 사람도 없어서 한참 이른 시간에 공항 가는 버스를 탔다. 다행히 호텔 바로 앞에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햇살과 더위라면 지겨울 만도 한데 반쯤 내려진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굳이 피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이내 알아챈다. 이제야 가을이구나. 한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더위에 시달렸는데 이 좋은 가을날을 두고 떠나네. 특히 한국의 가을은 편애하는 계절이니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어쩐지 힘들었던 지난여름이 나름, 애틋했다.


지난여름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거친 여름 중에 가장 길고 깊은 여름이었다. 도망갈 수도 없는 속수무책의 여름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끝나고 나니 그런대로 잘 견딘 것 같다. 여행보다는 지속되는 일상을 계획하며 왔지만 이젠 여행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래야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감정의 부스러기들을 털어낼 수 있다. 이만하면 여행의 끝으론 충분하다.

대한항공은 오랫동안 유지했던 비빔밥을 묵밥으로 바꿔서 야채가 숙채가 아니고 생채였고, 그래서 늘 고추장 없이 나물 반찬에 밥을 먹듯이 비빔밥을 먹었던 나는 이번엔 소고기 스튜와 매쉬드포테이토를 먹고 아침으론 흰 죽을 먹었다, 난기류를 만나 여러 번 심하게 흔들리긴 했지만 예정보다 일찍 밴쿠버에 도착했다. 공항엔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헌터를 혼자 두고 외출한 적이 없어서 이웃에 사는 친구 셜리에게 맡기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낯가림이 심한 헌터가 신기하게도 셜리는 처음 만날 때부터 좋아하더니 산책하다 셜리가 사는 빌딩으로 들어가려고도 하고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너무 반가워해서 샘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한테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 일단 친구집에 가서 헌터를 데리고 나와서 함께 집으로 갈 계획이라며 필요 이상으로 설명을 했다. 아이가 걱정이 많은 게 분명하다. 내가 이렇게 돌아올 줄 모르고 임시보호를 시작했고, 내가 개를 무서워하는 것도 알고 헌터가 낯선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는 것이리라. 집에 있는데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보다 로비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들어가면 더 안심하는 것 같아서 집으로 친구가 올 때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사실은 헌터가 온 후에 집으로 온 친구는 셜리밖에 없긴 해. 헌터가 무서워할까 봐 친구들도 거의 안 만났거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론 걱정이 많았다. 나는 아직도 큰 개가 무섭다. 언제 입양이 될지 모르니 끝을 알 수 없는 동거였다. 과연 함께 잘 지낼 수 있을까?


겨우 6개월인데 6년쯤 떠나 있다가 돌아온 것 같았다. 차창밖의 햇살과 바람에 실려오는 공기가 맑고 달았다. 시차 적응을 빨리하려면 이 시간에 자면 안 되는데 비행기 안에선 거의 못 자는 편이라 한꺼번에 졸음이 몰려왔다. 어쩌면 이젠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뭐라 하는 소리를 꿈결처럼 들으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잠을 잤다.


하윤은 헌터를 데리러 셜리집으로 올라가고 나는 로비에서 기다렸다. 그 잠깐 동안에도 졸음이 쏟아졌다. 깜빡 졸았나 싶었는데 뭔가 기척이 느껴져서 눈을 떴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헌터가 있었다. 아이가 임시보호를 한 지난 사 개월 동안 사진도 많이 보고 둘의 생활을 거의 날마다 아이에게 보고를 받다시피 해서 그리 낯설진 않았지만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훨씬 더 잘생기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된 게 보였다.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 컸다.


뒤따라 오던 아이가, 헌터, 마미야. 마미..라고 분위기를 띄웠지만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나 선뜻 가까이 가지 못해서 우리의 첫 만남은 인사도 없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덩치와는 달리 순한 녀석이었다. 겁이 나서 경계를 하긴 해도 공격성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우린 함께 집으로 갔고 헌터와 나는 집안에서 서로의 눈치를 보며 동선이 겹칠까봐 슬슬 피해다니는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 꼴을 본 아이만 이렇게 재밌는 장면을 보다니!를 숨기지 못하는 표정이다. 헌터야! 우리, 친해질 수는 있을까? 


혹시라도 둘이 영영 친해지지 못할까 봐 아이는 은근히 걱정을 했지만 나는 그냥 시간의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내가 이래 봬도 동네 강아지들이 다 좋아하던 사람이라네. 저 녀석이 별난 거야. 그런데 헌터와 둘이 산 줄 알았더니 식솔이 더 있었다.


얘는 이름이 뭐니?

응? 누구?

나는 '먼지와 털'이라고 부르는데 너는 같이 살았으니 애칭이라도 있을 거 아냐.


아이는 내 기습공격에 허리까지 꺾으며 깔깔 웃었다. 엄마 가고 혼자 있을 땐 그래도 청소랑 음식 만드는 거 잘했는데 헌터가 오고부터는 재택근무하고 헌터 돌보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못했다고... 그래도 엄마 오기 전날 나름 청소를 한 거라고.. 네네... 오자마자 삼일 동안 쓸고 닦고 빨고 정리하고,를 반복했다. 휴..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집으로 돌아온 이틀 뒤 새벽부터 함께 걷기 시작했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시차 적응을 못했으니 아마 혼자였다면 이렇게 빨리, 그것도 새벽에 걸을 생각은 안 했겠지만 새벽마다 하윤과 헌터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사실은 그제야 막 깊은 잠이 들려던 참이었지만 한 번 깨면 다시 잠들기 어려워서 차라리 일어나 함께 걷는 것을 택했다. 어쩌면 잠 때문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걷는다는 행위자체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몸은 이제 완전히 떨어져 나왔지만 아직 거풍 시켜야 할 감정들이 남아있었다.


이럴 땐 걷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생각이나 말은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또 다른 위선과 원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몸의 정직함에 기대어 걷다 보면 마음은 문을 열고 버릴 것은 버리고, 아프지만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다독거린다. 이제 다시 또 시작하는 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침노을이 옆동네 동쪽 거리 끝에서 밀물처럼 번지고 있었다. 새삼, 이렇게 걷기 좋은 자연이 내 가까이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몇 년 동안 직장과 집만 오가면서 문밖의 아름다움은 외면했었다. 특히 이 동네로 이사 온 후로는 더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오는 생활이 전부였다. 어쩌다 필요한 일이 있어서 외출을 해도 차로 움직이니 주변에 어떤 자연이 있는지 눈 돌릴 기회도 마음도 없었다.



아침마다 헌터와 함께 산책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사실 산책이란 우아한 단어는 적합하지 않은, 가끔은 꽤 고난도의 달램과 기다림과 경계심이 필요한 걷기였지만 언제나 집을 나서면, 나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헌터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날마다 조금씩 동선을 바꿔가며 옆동네의 앞동네, 앞동네의 뒷동네까지 구석구석 걷다 보니 도심의 자연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한 자연이 집 주변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두 헌터 덕분이다.


헌터는 트라우마를 가진 개답지 않게 성품이 무척 온순하고 젠틀했다. 만난 지 이틀 만에 '젠틀맨'이라는 애칭을 주었다. 모두가 그동안 아이가 들인 노력과 사랑 덕분이었다. 야행성이었던 아이는 무서운 게 많은 헌터를 위해 새벽 5시면 일어나 한두 시간씩 산책을 시키고 밥을 먹이고 다시 조금 놀아준 후에 출근을 하는 아침형 인간이 되었고, 일하는 동안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면서 쪘던 살도 다 빠져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생리도 규칙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엄마, 힘들고 고생스러운 적도 많았지만 헌터가 베스트 트레이너고 패밀리 닥터보다 더 도움이 됐어. 아이와 헌터가 걷는 뒷모습을 보거나 넓은 잔디밭에서 함께 뛰는 걸 보면 행복이 참 별게 아니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아이는, 헌터와 점점 정이 들어서 어떤 날은 정말 자기가 입양하고 싶지만 헌터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기도 하고 앞으로의 자신의 계획이 유동적이라서 그럴 순 없다면서도 입양신청을 한 사람이 있어서 서류검토 중이란 연락을 받고는 금세 우울해졌다. 임시보호가 입양만큼 중요한 이유를 잊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자꾸 입양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검토 중이라던 입양신청자는 헌터에게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닌 것 같아서 신청을 거절했다고 다시 연락이 왔다. 사 개월 만에 처음으로 들어온 입양신청이라는데... 여러 가지로 마음이 착잡했다. 이왕 입양을 보낼거면 빨리 가는 게 좋을텐데... 어쨌든 헌터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떤 식으로든 헌터에겐 좋은 일이 생길거라고 믿었다.



냉동실을 보니 얼린 과일이 종류별로 잔뜩 있었다. 한 박스 사놓고 간 코코넛 워터도 절반이 넘게 남아있고.. 여름 동안 스무디를 계속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헌터가 오고부터는 바쁘기도 하고 피곤해서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미 찬 음료보다는 따뜻한 걸 찾게 되는 날씨지만, 조금 더 서늘해지면 시원한 음료는 생각도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날마다 과일 스무디를 만들어 햇살이 가득 찬 오후의 창가에서 아이와 한 잔씩 나눠마셨다.

우기가 시작되어 비 오는 날이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맑은 날엔 햇살이 좋다. 여름내 타박하던 뜨거운 햇볕이 다정한 햇살이 되는 계절이다.


인디언 써머, 이 짧은 틈새 계절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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