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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치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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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10. 2023

호흡 짧은 기억

경춘선



기차를 타면 말이지


설렘 숨기고 찾아가는 내 자리에

추억이 먼저 와 앉아있었지

빗살무늬로 멀어지는 풍경 속엔

유년의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한 시절이

윤슬인 척 손을 흔들더라.


아마 네 생일이었을 거야.

봄꽃들 놀래키는 재미도 시들해진 햇살이

아무 데나 주저앉아 수다를 떠는

어느 사월 오후,

집 앞에 놓여있는 자전거에 오르듯 기차를 탔어.


성북역 근처

오래된 이정표처럼 서 있는 네가 보이면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췄지

나를 기다리는 네 모습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창문 낮은 찻집의 구석자리

돌아갈 시간이 적힌 기차표를

모래시계처럼 세워두고도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아

막차를 놓칠까 봐

내 손을 잡고 광장을 가로질러 뛰던 너

웃음 갈피에 끼워둔 미처 하지 못한 말,

나는 아직도 가끔

그 말의 안부가 궁금하다.


가쁜 숨 몰아쉬기도 전에

덜컹, 기차는 움직이고

창밖 어둠 속에 서 있는 너는

내겐 이미 그리움이었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

선잠 든 슬픔처럼 엎드린 남춘천역

나, 잘 왔어.

짧게 끊었던 공중전화의 그 주황빛이

여태도 호흡 짧은 슬픔으로 남을 줄 그땐 몰랐지

경춘선 기차를 타고 드나들던 그 시절이

이렇게나 긴 이별로 기억조차 아슴해질 줄

그땐 몰랐지.


경춘선 기차만 남아 추억을 지키고

다시는 호명하지 못할 우리가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지.




아주 오래된 글, 그리고 글보다 더 오래된 추억에 관한 기록이다. 그야말로 '유치찬란'하다. 처음으로 인터넷에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썼다. 실제로 서울에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남춘천역에서 내려 처음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이 글을 떠올렸다는 댓글을 남긴, 거의 신화적인 교감의 글벗이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간질간질한 행간에서, 일상의 고단함에 침몰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순수한 글자를 모으던 오래 전의 나를 본다. 만약 종이에 적어두었다면 끄트머리가 누렇게 변했을 만큼 시간이 지난 이 짧은 글 속엔, 세월 따라 사라진 것들의 흔적이 농담처럼 남아있다. 이제는 내 삶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들과 마지막 일별 하듯 옛 글을 다시 적는다.


여전히 마음이 아파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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