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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15. 2023

할머니의 꽃밭과 국어사전

과자와 귤이 맛있던 시절



할머니를 떠올릴 때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할머니의 꽃밭과 내 최초의 국어사전과 어느 해 무척 추웠던 겨울날, 투표를 하러 나가시던 모습이다. 금색 무늬가 자잘하게 박혀있는 공단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쪽진 머리 아래 하얀 목도리까지 두르신 후, 엄마가 미리 닦아놓은 털신을 신으시면서 두어 번 반복되는 아버지의 당부에(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꼭 어느 쪽에 동그라미를 치라고 하신 것 같다.) '참 걱정도 팔자다.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할까. '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당신의 총기를 의심(?)하는 아버지를 나무라셨다.


그저 따스하게 품어주시던 외할머니에 비해 친할머니는 무섭고 엄하셨다. 얼굴이나 체격도 선이 굵고 강하셨다. 한 집에 살았지만 늘 어려워했기 때문에 할머니와의 다정다감한 추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께 잃지 말아야 할 예의와 필요할 땐 부릴 줄도 아는 고집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셨고, 식물 가꾸는 걸 좋아하셔서 함께 사는 동안 세 번의 이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꽃밭이 있었다. 꽃밭에는 채송화, 봉숭아, 나리꽃, 맨드라미, 분꽃, 해바라기 같은 꽃들이 철을 갈아가며 피었고 어느 해엔 뱀딸기도 있었다.


할머니의 꽃밭은 내게, 달밤에 보는 나리꽃의 우아함과 맨드라미로 예쁘게 꾸민 기정떡(증편)과 분꽃의 까만 씨앗을 받으며 홀로 아름다웠던 늦은 오후와 손톱 위의 봉숭아 꽃물 같은 것들을 추억으로 남겨주셨다.


그리고 특별히 기억나는 꽃이 하나 더 있다. 작약,

몇 년 전까지 살던 옛 집 앞마당에 작약이 한 그루 있었다. 작약은 자라는 속도가 무척 빨라서, 겨울을 나는 동안 밑동까지 싹둑 잘라주어도 다음 해 봄에 두릅 같은 새순이 올라오면 금세 잎이 무성해지고, 단단하게 맺히는 꽃봉오리와는 대조적으로 흐드러지게 꽃이 피었다. 꽃송이가 얼마나 크고 실한 지 꽃대가 휘어져서 땅에 닿을 정도라서 꽃이 피기 시작하면 끈으로 빙 둘러 묶어주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지 않으면 말씀이 짧으셨고 잘못을 하면 무섭게 야단을 치셨지만 한편으론 드러나지 않게 자상하셨다. 말 수 적고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아버지의 엄함보다는 자상한 성품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어른이 된 후에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와는 다른 면을 알게 되어 실망하고 아파한 적도 많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내게 세상에서 '처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경험하게 해 주신 분이다.


어느 날, 며칠 동안 출장을 가셨다 밤늦게 돌아오신 아버지는 큰 흙덩어리가 매달린 뿌리를 신문지로 여러 겹 싼 제법 큰 화초를 내려놓았다. 그 화초가 바로 작약이었다. 평소에 가볍게 감정표현을 하지 않으시는 할머니가 마치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할머니가 평소에 꽃밭에 작약 한 그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 하신걸 아버지가 잊지 않고 있다가 구해오신 것 같다. 아버지는 일찍 혼자가 되신 할머니의 맏아들이었고 어쩌면 할머니는 외로움을 꽃을 가꾸며 달래셨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은 어른이 된 후에야 마치 퍼즐조각을 맞추듯 연결되며 이야기가 완성되기도 하는데 할머니와 관련된 내 기억들이 그렇다.


꽃밭 이외에 할머니가 간수하시던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할머니는 해마다 머루주를 담그셔서 철이 되면 산에서 머루를 따서 우리 집으로 팔러 오는 단골 아주머니가 계셨다. 또 할머니는 상비약으로 쓰신다고 말린 오징어 뼈를 손수건에 싸서 보관하셨다가 손을 베어서 피가 날 때면 갈아서 지혈제로 뿌려주셨고, 뒤란에 양귀비도 서너 송이 키우셨는데 아버지가 할머니께 유일하게 하시지 말라고 하는 일이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이러다 저 목 달아납니다,라며 은근히 겁을 주셨지만 이게 무슨 죄냐면서 여전히 양귀비를 키우셨고 늘 말린 양귀비 서너 송이가 어두운 광 한쪽에 음산하게 걸려있곤 했다. 할머니는 '전설의 고향'과 양주동 박사가 나오시는 ‘토요 초대석’을 좋아하셨다. 할머니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말을 잘하는 양반이 양주동 박사였다. 할머니는 양주동 박사를 ‘얘기 보따리’라고 부르셨다.


그러다 아버지가 부산으로 발령이 나서 엄마는 어린 두 동생들만 데리고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셨고 강릉 집에는 할머니와 바로 아랫 동생인 둘째와 나, 이렇게 셋이 살았다. 우리 가족이 두 집 살림을 시작한 그 해 겨울에 아버지는 내 생일선물로 '양주동 박사 감수'라고 쓰여있는 크고 무거운 국어사전을 사주셨다. 부산에서 소포로 베개만 한 크기의 국어사전을 부치시면서 나와 동생이 먹을 여러 종류의 과자도 함께 부쳤는데 할머니는 그 과자 상자를 우리 손이 닿지 않는 옷장 맨 위 선반에 얹어 놓고 할머니가 정한 기준에 따라서 그 과자를 먹을만한 일을 했을 때만 한 봉지씩 꺼내주셨다.


그때 먹었던 과자 중에 지금까지도 그 맛이 잊히지 않는 과자가 ‘초코파이’와 ‘샤브레’다. 초코파이의 말랑말랑한 마시멜로(그땐 뭔지 몰랐지만)와 폭신한 초코빵의 맛은 환상적이었고, 샤브레는 아껴가며 먹고 나서 에펠탑 그림이 있는 포장지를 조심스레 오려서 간직할 만큼 이국적이고 신기한 맛이었다. 설을 지내러 올라오신 아버지가 부산에서 사 오신 '귤'을 처음 먹어본 것도 이때였다. 그 후로 강릉에서도 귤을 사 먹을 수 있게 되면서 매년 겨울이면 손바닥이 노랗게 되도록 귤을 까먹었고 할머니는 귤껍질을 말려 차를 끓이셨다. 지금은 농약 때문에 먹으면 안된다고 해서 귤껍질을 음식물 찌꺼기로 버릴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시절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사전 찾기는 꽤 재미있는 놀이였다. 한 단어의 뜻을찾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낱말들이 금방 뽑아 올린 감자 뿌리에 매달려 있는 알감자들처럼 조롱조롱 연결되어 내 생각 어딘가에 쌓였다. 하지만 처음 아버지가 보내주신 사전을 펼쳤을 때는 사전의 용도와는 상관없이 그저 아직 내가 읽지 않은 책을 보듯 첫 장부터 읽어나갔다.  물론 그런 읽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곧 사전을 제 용도대로만 사용하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내가 사전을 볼 때마다 특별한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챈 후였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골목대장인 동생이 늘 밖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동생보다 훨씬 자주 과자를 먹었다.


할머니는 평소에 살갑고 따스한 표현을 하는 분이 아니셨고 표정도 좀 뚝뚝하셨는데 내가 사전만 펴 들면 흐뭇한 표정으로 옷장의 선반 위에 숨겨놓으신 과자 상자에서 과자를 꺼내 주시곤 했다. 학교 숙제를 할 때나 다른 책을 읽을 때면 그냥 지나가는 적도 있었는데 유난히 국어사전을 볼 때면 맛난 과자를 주신 이유가, 할머니껜 두껍고 큰 책을 본다는 것이 곧 어려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로 보여서 그러셨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 사전이 양주동 박사가 감수하신 책이라고 말씀을 드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늘 엄하시던 할머니의 숨은 귀여움을 찾아낸 내 추억은 조금 더 도톰하게 살이 오를 테니까.


이제는 꽃밭이 없는 집에서 살고, 사전도 종이 사전이 아니라 인터넷을 이용한다. 하지만 여전히 할머니의 꽃밭과 국어사전은 내 추억의 한 모퉁이를 단단히 지키고 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어떤 기억이 사근사근 긴 말을 걸어오면, 마치 방금 쪄 낸 햇감자를 쪼갤 때처럼 마음 안쪽에 따끈하고 포실한 '분'이 핀다.



옛집의 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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