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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Nov 05. 2022

추억은 현재 진행형이다

옛날 옛적, 외가 가는 길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길에 관한 아름다운 기억을 한 두 개쯤 껴안고 살아갑니다. 그 길의 풍경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서일수도 있지만 대개는 동행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혹은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지에 따라서 기억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더해지기도 하지요. 제가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길 중에 하나는 어릴 적,


외가 가는 길입니다.


방학 때마다 거의 외가에 갔지만 제 기억 속의 '외가 가는 길'은 예닐곱 살 때쯤 저를 데리러 온 이모를 따라 외가로 가던 날입니다. 버스표를 보기만 해도 멀미를 하던 때라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창밖 먼 풍경을 바라보며 속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지요. 외할머니가 당부하셨거든요. 멀미가 나면 창 밖의 먼 곳, 특히 산이나 나무 같은 초록색 풍경을 보라고. 그렇게 간신히 속을 다스리면서 그 다리가 보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작은 개천을 지르며 놓여있는 좁은 콘크리트 다리가 보이면 바로 외가 마을에 도착했다는 신호거든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버스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고 양쪽으로 펼쳐진 논을 바라보며 좁은 시골길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엄마와 이모들이 다녔다는 국민학교가 보입니다. 드문드문 심어져서 담장 구실을 하는 나무들 사이로 운동장이 보이는 학교를 반쯤 돌아서 얕은 언덕을 올라 대숲을 지나고, 울창한 밤나무들을 올려다보며 걷다 내리막 길로 들어서면 맨 처음 나타나는 마당 넓은 집이 외가였습니다. 그리고 외가엔 늘 조용하고 환한 미소로 저를 반겨주시는 외할머니가 계셨지요. 언젠가 제가 꽤 오랜만에 갔을 때는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오신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아무리 오래 산다해도 그 누가 미처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나를 반기러 뛰어나오겠나, 생각하면 할머니가 더욱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유년의 외가를 생각하면 순한 향기처럼 떠오르는 것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외가가 좋은 이유는 거기 외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뒤란에서 뽀독뽀독 익어가던 풋과일이 제풀에 툭툭 떨어지고 우물물이 유난히 차고 시원해지는 여름,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할머니는 마당 한가운데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우셨습니다. 그 멍석 위에 그대로 벌렁 누워서 하늘과 나무들을 보노라면 바람은 점점 시원해지고 푸르스름하던 저녁이 켜켜이 어둠에 싸여가는 게 보입니다. 가끔씩 살갗에 소름이 돋았지요. 문득, 맨살에 닿는 멍석의 촉감이 까끌해서 좀 불편합니다. 아마 감촉 때문이 아니라 조금 심심해졌기 때문이었겠죠. 이때쯤이면 할머니가 부엌에서 삶은 찰옥수수와 새콤달콤한 자두 같은 풋과일을 내오십니다.


할아버지와 이모들은 빨리 가야 앞자리에 앉는다며 찰옥수수를 한 자루씩 입에 물고 서둘러 학교로 갔습니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자체 발전기로 틀어주는, 마을에 딱 하나 있는 티브이가 학교에 있었거든요. 황지의 우리 집엔 흑백 텔레비전이 있어서 티브이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저는 그냥 할머니와 집에 남습니다.


외가의 식구들이 다 빠져나가서 갑자기 휑해진 마당엔 할머니와 저만 남습니다. 할머니는 모깃불을 피우시고도 혹시라도 제가 모기에 물릴까 봐 이모들의 길고 헐렁한 가을 옷을 입혀주셨지요. 넌 피가 달아서 모기가 잘 문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날의 느낌과 빛깔과 냄새는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모기를 쫓아준다 해서 기꺼이 참을 수 있었던 매캐한 모깃불 냄새, 잔잔하게 곁에 앉으셔서 먹기 좋게 옥수수를 손으로 뚝 분질러서 건네주시던 할머니의 손길, 소매 긴 옷이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지던 시골의 차고 맑은 여름밤 공기,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꾀'라고 불렀던 연둣빛 자두의 맛, 그리고 그 여름의 밤하늘. 눈만 깜빡거려도 톡, 떨어져 내릴 것처럼 맑은 별들이 참 많았습니다.


또 겨울 아침이면,

추수 후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빈 낟가리들로 부엌에선 군불을 지피곤 했습니다. 저는 자다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로 불을 때는 이모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꽃이 잦아들고 나면 튀밥처럼 튀어 오르는 몇 안 되는 쌀알갱이들을 주워 먹으려고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별 맛도 없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었지만 재밌었거든요. 날마다 불 때는 게 싫어서 입이 뾰로통 나온 이모의 마음 따위는 짐작도 못하면서요. 나와 6살 터울이던 이모는 그때 중학생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부엌은, 어린 제겐 굉장히 길어 보였고, 행주로 연신 닦으셔서 반질거렸던 크기가 다른 가마솥 여러 개가 있었고, 부뚜막은 늘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뭉근하고 푸근한 냄새가 났지요. 탄탄한 흙바닥으로 된 부엌의 입구 쪽 끝은 소 외양간이었는데 여물통이 부엌의 안쪽을 향해 놓여있어서 부엌에서도 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외양간에서 가장 가깝고, 또한 가장 크기도 한 가마솥은 소여물을 끓이는 솥이었는데, 여물에 넣을 볏짚을 자르느라 발로 작두질을 하시는 할아버지와 때맞춰 볏단을 작두속으로 넣는 이모는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처럼 박자가 착착 맞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하면서도 혹시라도 이모가 손을 다칠까 봐 무서워서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김이 오르는 가마솥에서 큰 바가지로 여물을 떠서 구유에 부어주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중 가장 흐뭇하고 평화로웠던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나와는 별 대화도 없이 지낸 할아버지는 밤이 되면 남포등에 불을 댕기고, 켜켜로 볏짚을 깔아 갈무리를 해두신 잘 익은 홍시를 광에서 내왔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랑한 홍시를 반으로 쪼개서 그 선홍의 속살을 한 입 베어 물면 이가 시린 달콤함에 저절로 웃음이 나곤 했지요. 한번은 할아버지가 놋세숫대야에 홍시를 담아오셔서 질색을 하면서도 그 맛을 포기못해서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밤바람이 문풍지를 가볍게 흔들며 지나갈 때마다, 지난가을에 이모가 창호지에 넣어서 문을 발랐던 노란 국화 꽃잎과 빨간 단풍잎이 잠깐씩 잠이 깨 덩달아 흔들렸습니다.


이렇게 외가에 얽힌 기억은 그 어떤 유년의 기억보다도 선명하고 예쁩니다. 하지만 따끈한 부뚜막에 올라앉아 삶은 감자의 껍질을 벗겨서 달게 양념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도 방금 쪄 낸 감자처럼 포실한 추억이 쌓이고 있다는 걸 그땐 몰랐습니다. 게다가 이렇게나 오랜 세월 내내 우려내고 우려내도 향기가 바래지 않는 추억이라니요.


살다 보면 착하고 예쁜 추억 하나가 잡다한 일상의 힘듦을 위로해 줄 때가 있습니다. 살면서 대체로 그랬던 것 같아요. 속상하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고 절대로 잊지 못할 거라고 입술을 깨물던 일들은 의외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져서 점점 희미해지지만, 풋풋하게 예뻤던 사소한 기억들은 철 되면 새순 나고 꽃 피듯이 스스로 도톰하니 살이 올라 늘 생생한 추억이 됩니다.

제겐 아직도 그 시절의 추억들이 그때 보았던 여름밤의 별빛처럼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밤하늘을 쳐다볼 때면 마치 그날의 하늘을 데려다 펼쳐놓은 것처럼 어디선가 문득, 어릴 적 외가의 냄새들이 나고 뭉클하게 그리워지는 것들에 겹겹이 둘러싸이곤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외가에서 보냈던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 고작해야 방학 때나 내려갔으니까요. 하지만 그 시간들이 제 유년을 키웠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언제든 순수하고 따스하게 기억할 추억이 있다는 것은 때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사람의 어린 시절이 중요한 이유는 그때에 배운 습관이나 마음씀이 어른이 된 후에 근본을 이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순하게 사랑받았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서 겪게 되는 팍팍한 삶의 절망이나 결핍을 수시로 다독거려주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것은 성장한 후, 내가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성취감만으로는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충만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추억은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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