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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l 31. 2022

머핀 탑(muffin top)에 관한  몇 가지 진심



컵케익은 좋아하지만 머핀은 싫어합니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제겐 호불호의 경계가 아주 선명한 빵이지요. 그래서 한때는 아주 맛있는 컵케잌 레시피를 갖고 있고 꽤 자주 굽기도 했지만, 머핀은 한 번도 만들어 본 적도 없고 먹고 싶어서 산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식구 중 누군가가 머핀을 사 올 때가 있어서 가끔 손이 갑니다. 식구들이 사 오는 머핀은 나름대로 맛이 검증된 머핀이기 때문에 한껏 부풀어서 바삭하게 구워진 '머핀 탑'은 먹을만합니다. 아니, 때론 컵케익만큼 맛있게 먹은 적도 있지요. 그런데 그때마다 겉보기엔 먹음직스러워서 집었다가 한 개를 끝까지 다 먹은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머핀 탑을 달랑 떼어먹고 난 후, 주름 종이에 싸여진 나머지 부분 때문입니다. 처음 몇 번은 머핀 탑만 먹고는 더 이상 못 먹겠다고 내려놓으면 마지못해 다른 식구들이 먹었지만 얌체처럼 매번 그럴 수는 없으니 언제부턴가 아예 먹을 생각을 안 했습니다. 아무리 머핀을 좋아하는 사람도 머핀 탑이 없는 머핀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게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컵케익과 머핀의 차이기도 합니다.


머핀은 뭐랄까, 책임감과 이타심을 꽤 요구하는 음식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머핀 탑만 떼어먹고 나머지를 남기는 건 지독하게 이기적인 행동이므로 먹으려면 끝까지 먹어야 하고, 그럴 자신이 없다면 아예 머핀을 먹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거죠. 그런데 얼마 전에 그토록 경계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살다 보면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은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머핀 탑만 달랑 떼어먹었습니다. 괜히 웃음이 나더군요. 히히. 딱 이 웃음이었어요. 하하 호호 헤헤 큭큭도 아닌 '히히'. 예상 밖으로 즐거웠어요. 물론 식구 중 누군가는 머핀 탑이 없는 머핀을 먹으면서 투덜거렸겠죠. 하지만 조용했던 걸 보면 제가 먹은 줄 알았던 거지요. 그러니까 저는 집에서 이타심과 책임감에 대해선 가장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예전에 티비에서 머핀 탑만 파는 미국의 어느 빵가게를 본 적이 있어요. 처음엔, 와~ 누군지 나 같은 입맛을 가진 사람이 아이디어를 냈구나, 하다가 아니, 그럼 나머지 부분은 버리는 거야? 였어요. 아니면 머핀 탑만 굽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 아마 얕은 머핀 틀에 쿠키처럼 머핀을 굽는 것 같았어요. 어쨌든 그 빵집이 우리 동네에 있다고 해도 사러 갈 거 같진 않습니다.

머핀을 좋아하지 않아서기도 하지만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머핀은 책임과 이타심에 관한 빵이라고. 때때로 제 삶에서 그 두 가지를 배신하고 싶다는 걸 공개적으로 들킬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요새 저는 가끔, 진심으로 머핀 탑만 달랑 떼어먹고 달아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삶에게 좀 신물이 난 걸 수도 있고, 일종의 노화현상일 수도 있어요. 뜬금없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것, 그것도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니까요. 어쩌면 나 자신의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본능일 수도 있고요. 언제부턴가 '귀소'는 흔히 고향이라 불리는, 형태를 지닌 장소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숱한 내 안의 나 중에서 내가 좀 아끼고 사랑해 주었더라면 싶은 '처음이자 마지막의 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노화현상이라는 말을 하다 보니 또 다른 '머핀 탑'이 떠오르는군요.


저는 결혼 후 첫 10여 년 동안 야금야금, 살이 꽤 쪘습니다. 워낙 말라서기도 했지만 암튼 살이 많이 쪘어요. 그런데 다리와 엉덩이는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랐을 때 입던 청바지도 엉덩이까진 쑤욱 잘 들어갔지요. 문제는 그다음, 종족번식을 위한 투철한 책임과 사명의식이 숨겨져 있어서 기회만 되면 영토확장으로 힘을 기르려는 아랫배와 허리가 지나치게 임무에 충실했더군요.

입술을 꼭 다물고 숨을 있는 대로 들이마셔 배를 넣으며 지퍼를 올리고 버튼을 채웁니다. 와! 드디어 성공! 야호! 아직은 괜찮다고!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나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소심한 소리가 들립니다. 출렁...

안감힘을 쓰며 허릿단 위에서 버티고 있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옆으로 쓰러지는 세월들. 딱 한 자로 줄이면 '살'이라고 하고, 두 자로 하면 '군살'이라고 합니다. 먹으라고 줘도 무조건 사양하고 싶고 누가 가져가서 대신 먹어준다면 예쁜 리본까지 달아서 기꺼이 주고 싶은, 요것도 '머핀 탑'이라고 부르지요.


이쯤에서 숨을 좀 가다듬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머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지? 그렇죠. 사물에 대한 비유는 늘 삶으로 전환됩니다. 생각의 확장일 수도 있고 축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런 전환이 아니라면 사물이나 자연을 오래, 깊이 바라보고 홀로 떨어져 나와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아름다운 자연이나 매력적인 사물을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하지만 위로가 되었다는 건 이미  그저 '바라보기만'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인가와 치환되었다는 뜻이죠.


살아오는 동안 숱한 머핀 탑을 만났습니다. 두 가지 다른 머핀 탑이 뒤엉켜서 삶은 늘 가볍지도 친절하지도 않았어요. 먹고 싶은 머핀 탑은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면서 손 닿기 힘든 곳에 있었고, 떼어내고 싶은 머핀 탑은 삶 속으로 무작정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후회와 결핍은 삶의 장신구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이란, 단 한 가지의 기쁨으로 아홉 가지의 힘듦을 상쇄시켜야 하는 터무니없는 계산법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공정하지 못한 계산과 억울하게 기우는 조건으로도 대차대조표를 맞춰가야 하는 게 삶인걸 어쩌겠어요. 섭섭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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