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고요

바다는 여전히 과묵하다.

by 윤서



오래 기다린 비가 내렸다. 충분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해갈이 되었을 것 같다. 비가 그친 후의 바다는 거칠다. 집에서 나와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묵직하고 덩치 큰 울림이 들린다. 귀가 먹먹하다. 마치 주변의 자잘한 소리쯤은 다 묻어버리겠다는 듯이 소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하지만 모나고 거친 소리가 아니라 뭉근하면서도 경외심을 불러오는 소리, 바다가 내는 소리란 걸 곧 알아챈다.


바다에 도착하니 바람이 몹시 불고 파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었다. 평소엔 한 줄씩 차례대로 밀려왔다면 오늘은 마치 함성을 지르는 군중처럼 몰려온다. 비옷의 후드까지 꽁꽁 여몄는데도 온몸이 흔들린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바다를 오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뭔가 후련함을 감지한다. 어쩌면 나는, 저 바다처럼 한 번쯤은 깊은 속을 뒤집어 내보이며 감정의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는지도 모른다.



바닷가옆 송림안은 오랜만의 물기로 진한 향이 났다. 푸슬푸슬 말라가던 모래흙과 시든 솔잎이 깔려있던 바닥이 축축한 붉은색이다. 비바람에 나무에서 먹을만한 게 많이 떨어졌는지 새들은 날지 않고 인기척도 무시한 채 바닥을 뒤진다. 나는 여전히 바람에 등을 떠밀리며 걷고 있는데, 가장 힘든 건 이미 지나갔다는 듯, 이 거센 비바람과 파도속에서 묘한 고요가 느껴진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너무 뻔한 진실이 유독 실감날 때면 마치 그동안 몰랐던 진실의 얼굴을 대면한 것 처럼 낯설면서도 경이롭다.


걸어서 강문 해변 근처에 가니 여행을 온 듯 보이는 두 여자가 있었다. 작은 호텔과 콘도가 가까이 있어서 포토존이라 부르는 이 근처엔 늘 여행 온 사람들이 보인다. 비옷 같기도 하고 큰 타월 같기도 한 것을 뒤집어쓰고 바람 부는 바다 가까이 서 있는 그녀들은 먼 발치에서 봐도 즐겁다는 게 느껴졌다. 뭘 해도 예쁜 젊음인 것이다. 이 거친 바다의 파도와 비바람조차도 그녀들에겐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추억이 되지 못한 기억들이 늘어나는 것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전해줄 것도 아니고 얼굴이 나오게 찍을 수도 없으면서도 나는 마치 아름다운 풍경을 본 듯 멀리서 사진을 찍었다. 지금 그들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한 시절을 갖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젊음이 소중한 걸 젊음만 모른다는 노파심과 부러움 섞인 말장난 따위는 비웃으며 그 모든 걸 제대로 느끼며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의 너울이 심해도 꿈을 잃지 말기를. 현실적인 이유때문에 꿈을 잊고 사는 것과 잃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 아파할 걸 뻔히 알더라도 꿈은, 잃지않고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촉촉해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keyword
윤서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출간작가 프로필
팔로워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