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수에 익숙해 지기

빈 의자

by 윤서



한국에 온 후로 날마다 바닷가 송림을 걷기 시작한지 두 달반쯤 되었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 느긋한 산책이 아니라 운동에 가깝게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마치 걸음의 속도를 올리면 그만큼 근심이 떨어져 나간다는 걸 검증이라도 하려는 듯 걷다 보니, 중간에 바다와 마주 보며 앉아서 쉬는 시간이 더할 수 없이 달다.


바다를 따라 끝이 안 보이게 계속되는 송림 안에는 꽤 많은 벤치들이 있는데 거의 모든 의자들이 바다를 향해 놓여있다. 제법 우아한 철제 곡선을 옆에 붙인 깔끔한 나무 의자들도 있고,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듯, 해풍에 색이 바랜 의자들도 있다. 이런 의자들은 사람이 앉기 위해 놓여있는 게 아니라 의자 스스로 고요히 앉아서 바다를 불러내는 것 같아서 벤치가 놓여있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쉼'이 된다.


그런데 내가 걷는 시간엔 거의 모든 의자에 햇볕이 든다. 아침 바다의 햇살은 맑은 만큼 뜨겁다. 송림은 멀리 서는 울창해 보여도 나무 사이의 간격이 꽤 넓어서 나무 하나하나의 그림자를 다 볼 수 있다. 그러니 그만큼 햇살도 넘친다는 뜻이다. 그늘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면서 햇살은 항상 비슷한 양과 속도로 내 걸음을 따라온다. 그래서 잠깐 쉬는 곳은 그늘지고 시원한 곳이길 바라며 걷는 중에도 의자가 보이면 주변을 살펴본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오래된 의자를 하나 발견했다.


말끔한 철재의자가 아니라 해풍과 세월에 적당히 낡은 나무의자인 데다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의자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의자들은 몇 그루의 소나무가 앞에 있어서 시선을 막았는데 이 의자는 송림의 그늘 아래에 놓여있으면서도 앞에 보이는 건 모래사장과 바다뿐이었다. 마치 보물 찾기에서 바라던 상품을 찾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나의 의자'를 찾았다.

바람과 파도가 내게 걸어오는 말들이 풍경에 걸려 굴절되지 않고 바로 내 안으로 들어왔고, 나도 바로 풍경의 일부가 되는 황홀한 아침이었다. 단지, 발을 올려놓기 좋은 마른나무 등걸이 길게 놓여있는 게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건 마치 나보다 먼저 이 자리를 발견한 사람의 영역표시 같았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그래서 내가 언제 오더라도 비어있는 그런 '나의 의자'이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늘 운이 좋기를 바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예상대로 내 행운은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그 긴 하루 중에 하필 내가 걷는 시간에, 하필 내가 그 의자에 앉아 쉬고 싶은 이 순간에 누군가 앉아있는 걸 보면서 모르는 사람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이렇게나 긴 바닷가에 이토록 많은 빈 의자가 있는데 하필 왜 저 의자에 앉은 걸까... 내가 왜 그 의자를 좋아하는지를 생각한다면 나른 사람들도 똑같을 거라는 걸 인정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괜한 원망과 불평으로 심기가 순해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뜻밖의 나의 모습이었다.


어쨌든 삼일을 내리 그 의자는 나의 의자가 아니었다. 이쯤 되면 생각의 전환은 거의 보호본능에 가까워진다. 하루 중 유일한 힐링타임이었던 아침 시간을 스스로 망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나야말로 송림 곳곳에 이렇게 많은 의자들이 있는데 꼭 그 의자에만 앉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게 집착처럼 느껴졌다. 이럴 일이 아니라는 제법 냉정한 판단을 하고 마음을 바꾸려 해도 여전히 그 의자 근처에 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누가 앉았는지 아닌지 재빠르게 살펴보고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다. 누군지 참 꾸준하게도 나보다 먼저 와서 앉아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늘 같은 사람인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 날엔, 의자를 가운데 두고 반대쪽에서 오는 한 남자와 거의 경주를 한 적도 있다. 자전거를 타다가 잠시 쉬려고 숲에 들어온 그는 아마도 평소의 속도로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더 먼 곳에 있다는 걸 알아채고 걸음을 재촉했다. 의자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같은 목표를 향해 걷고 있다는 것을 나처럼 그도 알아챈 것 같았다.

평소의 나라면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챈 순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끝까지 갔다. 의자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 남자는 나를 힐긋 보더니 방향을 바꿨다.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후회를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 의자에 앉는 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전에 없는 이런 유치한 행동을 하는 걸까. 나는 선착순에 가장 취약하고, 멀쩡하게 앞에 섰다가도 사람들이 몰리면 자꾸 뒤로 밀리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래서 손해 보는 일이 많았다는 피해의식이 조금 있으면서도 평생을 '차라리 손해 보는 게 맘 편한'사람으로 살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서야 나를 위로할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까,


단 이틀뿐이었지만 나는 이 의자를 '나의' 의자라고 생각했고, 어느새 그 의자는 오래전에 내가 갖고 싶거나 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던, 그것도 가족을 위한 양보나 희생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주었던 것들의 상징이었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다시 반복되려는 상황을 거부하겠다는 내 의지의 표식이기도 했던 것이다.


혹은 어쩌면 나는 현재의 내 모습에 화가 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화풀이를 하듯, 이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것조차 내 것으로 지키지 못하면 내 인생에서 남는 게 뭐가 있겠냐는 오기를 부린 것일 수도 있다. 결국은 그래서 꽤 여러 날 동안 은빛으로 쏟아지는 아침바다와의 시간을 망쳤다. 부끄러움 끝에 기억해 낸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 근심과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는 걷다가 쉬고 싶을 때 근처에 있는 '아무' 의자에 앉는다. 물론 아직도 마음은 조금이라도 햇볕을 가려주고 바다가 더 잘 보이는 의자를 찾으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내 마음을 간수하는 일이 쉬워진 이유는, 여름이 다가올수록 일출시간이 변하고 해의 하룻길도 바뀌어서 대여섯 번쯤 나의 의자였던 그 의자에도 쨍한 햇살이 쏟아졌다. 이젠 비어있어도 앉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완벽하게 그늘이 지는 다른 의자를 발견했다. 소나무 몇 그루가 살짝 비끼듯 앞을 좀 가리기는 했지만 그 의자에 앉아도 여전히 바다는 아름답고, 바람은 정답고, 아침은 사랑스러웠다. 결국 나는, 의자 때문이 아니라 햇볕 때문에 의자를 가렸던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내가 하는 행동이나 욕망의 정확한 이유를 모를 때가 있다. 아쉽지만 분별력이 희미해지는 시간들을 뒤늦게라도 알아채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잘 변하지 못하니까.


삶에는 꼭 해야 하는 일과 안 해도 되지만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들이 아슬아슬하게 교차된다. 나이 듦이나 환경에 따라 이 두 가지의 비율은 달라진다. 그리고 대체로 우리는 늘 비율이 낮은 쪽을 갈망한다. 인간은 만족하는 법에 서툴고, 포기하기엔 미련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토록 원했던 '시간'을 큰 비율로 가졌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할 때는 그것만 이뤄지면 행복할 것 같다. 하지만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의 비율이 바뀌었다고 해서 바로 행복해지진 않는다. 삶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항상 변수는 있고, 그래서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한 삶의 규칙 같은 것이다.


오늘은 가장 먼저 눈에 띈 의자에 앉아 운동화를 벗어 모래를 털고 깊은숨을 내쉬며 바다를 바라본다. 아침 햇살이 만지고 지나간 바다의 표피는 은가루가 뿌려진 듯 반짝거린다. 일상에 숨어있던 아름다움의 발견으로 삶이 조금 유순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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