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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25. 2024

입양 1년 _ Gotcha Day

함께 가는 길, 헌터는 잘 있습니다.



겨울동안에도 아이와 헌터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산책을 나갔는데 저는 자주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갑자기 저질 체력이 되었는지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찍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제가 아침형 인간이 아니긴 한데 헌터 덕분에 변했나싶었더니 완전한 체질 개선은 못한 모양입니다. 그러다 오늘, 꽤 오랜만에 아침 산책을 따라나갔습니다. 봄이 턱 밑까지 몰려와 있더군요. 하긴 엊그제 아침, 멀리 내려다보이는 2층의 중간정원에 어린 벚꽃나무 세 그루가 연분홍 꽃을 피운 게 보이긴 했어요. 조석으론 아직 쌀쌀하지만 한낮의 햇살은 충만합니다. 동네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움 마로니에 나무가 있는 집의 정원에 백송이도 넘을 것 같은 황금빛 수선화가 만개한 풍경에 걸음을 멈춘 아침이기도 해요. 그리고,


오늘은 헌터를 입양한 지 일 년이 되는 날(Gotcha day)입니다. 그전에 한국에서 데려와 임시보호를 했던 9개월을 합치면 헌터가 식구가 된 지 어느새 2년이 다 되어가네요.


작년에 두어 달 동안 집중적으로 헌터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지만 그 후론 늘 반복되는 일상이라 안정적으로 잘 적응하고 있고 사진도 예전만큼 자주 찍지 않아서 따로 기록을 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입양 1년'이 되니 그야말로 감회도 새롭고 그냥 넘어가긴 좀 섭섭해서 안부 전합니다.


헌터가 밴쿠버에서 두 번째로 맞는 겨울, 작년엔 눈이 많이 와서 신났는데 올해는 몇일동안 쌓일만큼 눈이 내리진 않아서 헌터가 좀 아쉬웠을 거예요. 몇 년 만에 전형적인 밴쿠버의 겨울 날씨였거든요. 그리 춥지도 않고, 비가 자주 오는... 그래서 몇 번 왔던 눈도 이내 녹아서 빗물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이젠 봄이구나 싶은 삼월 어느 날, 눈이 내렸어요. 이른 아침에 산책 나가서 얇게 눈 덮인 학교 운동장을 맘껏 뛰어다니는 녀석을 구경했습니다. 어쩌면 그리 눈을 좋아하는지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눈이 잘 안 오는 곳에 살게 해서 미안하단 생각까지 들더군요.


이른 삼월의 어느 아침 발코니에서 바라본 설경, 꽤 멋진 풍경이었는데 반나절만에 다 녹았어요.
눈 쌓인 운동장을 한참 뛰어다니며 놀다가 갑자기 멈춤, 어딜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헌터는 아주 잘 지냅니다. 점점 더 영특해서 말귀도 잘 알아듣고 나쁜 습관도 거의 없습니다. 행동이 점잖고 조용해서 이웃들에게 칭찬도 자주 듣고, 여전히 물을 싫어하지만 이젠 비가 와도 버티지 않고 산책도 잘합니다. 외모도 어찌나 출중한지~ ('제 눈에 안경' 아닙니다~ 나름 소문난 우리 동네 미남입니다. ㅋ) 막 캐나다 왔을 때의 사진과 비교하면서 '헌터, 넌 개가 아니라 용이 됐구나. 혹시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 아니야?'라고 아이와 함께 주접을 떨면서 우리의 생활에 잘 적응해 준 헌터를 향한 기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헌터의 1년, 행복했지?


사실 저는 동물보다 식물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아이처럼 강아지 없는 내 인생은 '앙꼬 없는 찐빵' 수준은 결코 아니지만, 내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 집에 들어온 것들은 물건이든 생명체든 다 식구라 생각하며 금세 인생관도 바꾸는 줏대 없는 사람이라 어느새 헌터가 있는 삶이 참 좋습니다. 신경 쓰고 배려해야 하는 일도 늘었지만 헌터가 주는 순수한 기쁨과 긍정의 에너지에 비하면 정말 하찮은 일이지요. 가끔 아이와 이런 대화를 합니다. 우리가 헌터를 돌보는 게 아니라 헌터가 우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고요.


눈이 귀했던 겨울, 살짝 서리만 내려도 좋아했다. 아침 노을이 아름다웠던 어느 날.


헌터! 아프지 말고, 우리 함께 잘 살아보자. 그리고 이젠 게으름 안 피우고 새벽 산책에 꼭 따라나갈게. 내일도 깨우러 내 방으로 와줘. 하지만 자는 모습을 너무 빤히 들여다보진 말아 줄래?  나, 잘 때 안 예뻐.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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