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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pr 29. 2024

여행이 길어지면 일상이 된다

빨래방, 산책, 반찬, 커피, 다정함, 태풍까지도


여행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부터 여행은 일상이 된다. 그래서 맛집의 소문난 요리보다 내 주방에서 손쉽게 만들어 먹던 음식이 그립고, 햇반일망정 함께 먹을 반찬가게를 찾아보고, 갑자기 안경점에 가야 할 일도 생기고, 규칙적으로 빨래방에 가고 택배로 물건을 받고, 아침마다 산책하던 루틴이 깨진 게 아쉬워서 숙소 근처를 다시 한번 둘러보게 된다.



#빨래방_워쉬 앤 조이

장기체류할 숙소를 고를 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세탁실의 여부다. 입었던 옷을 날마다 빨아서 입으면 애초에 짐을 줄일 수도 있고 여행 내내 쾌적하게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호텔에서 제공하는 수건을 미리 한번 더 빨아서 쓰는 습관도 편하게 유지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여행할 때 필수품이 된 물건 중 하나가 트윈 사이즈의 얇은 순면 이불 커버와 베갯잇이다. 아가들의 애착담요 같은 건 절대 아니고 순면과 리넨 이외의 섬유 알러지와 약간의 결벽증 때문이다. 대부분의 숙박 시설의 침구는 순면보다는 면혼방이기 때문에 몇 번 고생한 후에 내린 나름대로의 해결책이다. 이젠 여행 필수품이 된 이불 커버는 이전부터 집에서 쓰던 것이라 꽤 낡아서 착착 접으면 부피도 얼마 안 되고 아주 보드랍다. 하나는 침대에 깔고, 다른 하나는 이불속으로 덮는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편하고 쾌적하지만 이래서 더욱 숙소에 세탁시설이 있는 곳을 선호한다. 어릴 때 할머니께서 나를 '풀로 붙인 살'이라고 걱정을 하셨는데 이 체질은 평생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사비를 조금 보탰어도 괜찮았을 텐데 시에서 제공하는 숙박비에 맞추는 걸 마치 여행의 목표 중 하나인 것처럼 즐기는 마음이 있어서 먼저 여행한 분의 리뷰를 보고 망설임 없이 선택했었다. 그리 후회하지 않는 결정이었지만 세탁실은 아쉬웠다. 그래도 객실 안에 놀랍게도(?) 스타일러가 있어서 아주 유용하게 잘 썼다. 하지만 물빨래를 해야 하는 것들이 있으니 근처에 빨래방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다행히 숙소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워쉬 앤 조이''라는 빨래방이 있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셀프 빨래방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백팩에 빨랫감을 넣고 숙소를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어서 좋았고, 와이파이와 에어컨도 있다. 세탁기가 설치된 곳 이외의 벽은 모두 유리로 되어있어서 그리 넓지 않은 곳이지만 답답하지 않고 편했다. 무엇보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크고 깨끗했고 세제와 섬유 유연제도 자동투입이 된다. 몇 달 만에 쓰는 건조기도 반가웠고 운동화를 빠는 세탁기가 따로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연히 발견한 산책로_활천 꽃무릇 숲길


집에선 큰 모니터에 연결해서 쓰던 랩탑을 자체 모니터로만 보려니 좀 답답해서 돋보기를 하러 안경점에 갔다. 난시가 심한 데다 짝눈이라서 시중에서 파는 돋보기는 사용할 수가 없다. 순식간(?)에 시력 측정과 완성된 안경까지 해치우는 시스템은 여전히 놀랍다. 어쩌면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일수도 있다.

안경점을 나와 다시 걸어 내려오다가 길 건너 한 풍경에 시선이 멈춘다. 제법 넓고 분주한 큰 도로의 바로 옆 치고는 나무들이 꽤 많아 보였다. 가로수의 연장인가 싶었는데 얼핏 걷고 있는 사람이 두어 명 보였다. 순간, 눈이 환해진다. 산책로구나! 강릉에 있는 몇 달 동안 매일 아침 바닷가를 산책하던 습관이 남아있어서 뭔가 아쉽던 참이었다. 산책로는 아래로 꽤 길게 이어지는 것 같았다. 계속 걷다가 처음 보이는 횡단보도로 길을 건넜다. 작은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큰 도로와 오래된 공업단지 사이에 끼어있는 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길은 예뻤다. 게다가 산책로만으로도 기뻐서 걸음이 가벼워지는 참인데 동색이지만 가장 많은 다른 색깔을 품고 있는 여름초록들 사이로 얼핏 얼핏 붉은색이 보였다. 뭐지?



꽃무릇이네?

잎이 없이 꽃이 먼저 피어서 상사화와 함께 금세 알아볼 수 있는 꽃이다. 놀랍게도 길 양옆이 꽃무릇 군락지였다. 가늘지만 꼿꼿한 연두 줄기들이 입을 야무지게 꼭 다물고 선연할 붉은빛을 익히고 있었다. 숙소까지 걷는 내내 아직은 숨은듯한 존재감의 꽃무릇은 계속되었고 안내 플래카드를 보고서 9월 18일에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는 것도 알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축제 때는 경로잔치와 사생대회도 열리고, 이 산책로는 25년 만에야 제대로 된 이름을 얻은. 활천 꽃무릇 숲길이 었다. 하지만 동단위 지역축제라서 그런지 김해시에서 준 여러 개의 여행 가이드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은 곳이다. 숲길에 반해서 나라도 알려야겠다는 시시한 사명감으로 꽃들이 만개할 때까지 날마다 숲길을 지켜보기로 한다.


다음날부터 일어나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이 길을 걸었다. 낯선 여행이 좀 더 일상적이 되자 오히려 여행의 감흥은 더욱 새로워졌다. 꽃무릇의 붉은빛은 하루가 다르게 제 영토를 넓혔다. 날마다 산책을 하며 꽃무릇의 안부를 묻는 동안, 태풍(힌남로)이 온 적도 있는데, 태풍이 지나간 후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찾아갔더니 그 험한 비바람도 낭창낭창 잘 달래 돌려보내고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자연은 참 신비롭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든 사양하지 않는 김밥_ 달인김밥

우연히 발견한 꽃무릇 산책로가 생각보다도 훨씬 길어서 처음으로 끝까지 가본 날, 평소엔 다니지 않던 길을 건너 숙소로 오는 중에 발견한 김밥집이다. 평소엔 컵라면을 거의 먹지 않지만 '김밥과 컵라면'세트는 일 년에 한두 번은 먹게 되는 조합이다. 김밥을 좋아해서 평소에 자주 만들어 먹기도 하고 내가 만든 게 가장 맛있다는 반 협박성 인정을 식구들에게 받아내며 자부심을 느낀 적도 있지만, 이젠 될 수 있으면 부엌과는 좀 소원한 관계로 남고 싶은 나이가 되다 보니 남이 해 준 음식이 가장 맛있다. 그래서 맛이 다소 부족해도 사 먹는 김밥이 더 맛있다. 김밥은 가성비를 무시할 수 없는 음식이다. 재료가 호화롭고 비싼 변형(?)김밥은 아무리 맛있어도 제 값을 못한다. 모름지기 김밥은 간편하면서도 맛있고, 맛있으면서 가격이 싸야 비로소 완성되는 음식이다.



달인 김밥은 테이크 아웃 전문점이다. 특이하게 새벽 5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문을 연다. 늘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기다리는 동안 재료를 다 놓은 후 집어넣으면 기계가 휘리릭 말아주는 신기한 광경도 보았다. 기본 김밥은 2,200원, 열 가지 정도 다른 김밥이 있는데 나는 2,800짜리 달걀김밥을 자주 먹었다. 의외로 김치김밥도 개운하고 맛있었다. 맛 한 가지로만 따진다면 좀 빠질 수 있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김밥 한 줄과 컵라면을 먹으며 행복한 한 끼 식사를 하기도 했고, 이른 아침에 산책 끝나고 오는 길에 여려 줄 사 와서 하루종일 나눠 먹은 적도 있다. 아, 그리고 바로 옆에 늘 열린 약국이 있는데 정말 늘 열려있다. 심지어 추석에도 열었다. 이용한 적은 없는데 근처에 이런 약국이 있으니 괜히 든든했다.



#뿌듯한 냉장고 _작은시장반찬가게

취사가 가능하지 않은 숙소에 있다 보니 먹는 게 불편하다. 혼자니까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될 거라 생각하고 음식에 대한 걱정은 안 했는데 바깥 생활이 길어지니까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집이었으면 있는 걸로 뚝딱 간단하게 한 접시 만들어 먹으면 될 텐데 그게 안되니 새삼 '밥이 상전'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러다 한국인임을 인증받는 기분으로 '배달의 민족' 어플을 깔고 배달이 가능한 반찬가게를 검색했다. 작은시장반찬가게, 200개가 넘는 리뷰가 칭찬 일색이었고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적당해서 주문을 했다. 배고플 땐 쇼핑하지 말라는 규칙이 적용되었는지 객실에 있는 냉장고가 제법 큰걸 믿고 정신없이 시켰다. 고등어구이와 달걀말이, 모둠나물, 밑반찬 몇 개, 데친 쌈채소와 강된장... 햇반을 데워서, 오랜만에 먹는 집밥 같은 밥이라고 감격하며 첫 끼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끼니가 늘어남에 비례해서 맛이 떨어졌다. 문득 궁금했다. 왜 집에서 내가 만든 반찬과는 달리 사 먹는 반찬은 남은 걸 다시 먹으려면 맛이 확 달라져 있는 걸까? 그래도 편하고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 찾아낸 나를 칭찬했다. 이만하면 훌륭하잖아.



#써~비쓰의 즐거움_흑당 라떼

일층 로비 옆에는 숙소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신청하면 7.000원에 먹을 수 있는 조식 공간과 간이 편의점이 함께 있다. 평소에 커피는 주로 카누로 해결하고 가끔 카페에서 마실 때도 늘 아메리카노, 가끔 카푸치노인데 숙소에 도착한 첫날, 조금 출출해서 안 마시던 라떼를 시켰었다. 흑설탕 맛을 좋아하는데 '흑당 라떼'가 있었다. 그리고는 그 맛에 반해서 세 번째로 사러간 날이었다. 원래 열 잔 사면 한 잔 공짜지만 오래 계시니까 오늘은 써~비쓰로 드릴게요.



카페인 때문에 커피는 싱글샷만 넣는다는 것도 기억해 주시고, 서비스는 주는 사람도 기분 좋고, 받는 사람도 기분 좋다는 예쁜 말까지 하신다. 직원분들이 모두 다정하고 친절하셨다. 언젠가는 매니저님이, 어째 점점 살이 빠지는 것 같다며 입맛 돋으라고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온 콩잎 장아찌를 주셨는데 깻잎과 비슷할 거라 예상하며 호기롭게 덤볐다가 얇은 콩잎 한 장에 참패를 당한걸 도저히 숨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를 서너 번 반복한 적이 있다. 너무나 내공이 부실했던 내 입맛때문에 좋은 마음에 보답을 못한 게 아쉽지만 그래도 웃음으로 남은 기억이다.



#나홀로 pizza night_청년피자토핑농장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에 핏자나 스시를 시켜서 먹으며 영화를 보거나 수다를 떠는 게 아이와의 주말 루틴 중 하나였다. 갑자기 피자가 먹고 싶어서 검색을 했는데 사진으로만 봐도 토핑이 맛있어 보이고 더구나 다른 종류 네 가지가 한 판에 들어있는 핏자가 있었다.



가게 이름은 처음 듣는 곳이지만 망설임 없이 시켰다. 이미 눈으로 맛을 본 후였으므로.. 에그콘, 폭탄불고기, 고구마, 슈림프피자가 각각 2쪽씩 8쪽이 들어있다. 이마트에서 산 야채샐러드와 함께 먹었더니 세끼가 해결되었다. 아주 맛있었다. 사진만 봐도 다시 먹고 싶어 진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_힌남노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뉴스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엄청난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졌다. 창문을 향해 돌진하는 비바람은 그 소리만으로도 불안했다. 혹시 유리가 깨져도 그나마 보호막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평소엔 반만 닫던 두꺼운 암막 커튼을 꽁꽁 닫고 잤다. 밤새 쏟아지던 비는 새벽이 되면서 서서히 잦아들고, 어쩌면 모든 버스 운행이 중단되고 학교도 임시 휴교를 해야 항거라는 전날의 문자와는 달리 태풍이 지나갔고 시내버스도 정상 운행한다는 문자가 왔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숙소에 머물기도 한다. 태풍의 피해를 입은 곳도 많겠지만 한 곳이라도 덜었으니 다행이다



이른 오후의 창밖 풍경,

태풍을 견뎌낸 하늘이 남은 구름을 쪼개서 멀리 보내고 있었다. 아픔 뒤에 성숙해진다는 식상한 표현처럼 폭풍우가 지나간 후의 하늘은 고요하고 더 깊어졌다. 자연의 이치가 곧 인생의 이치임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오후다.






이전 08화 풍경(風景) 안에 풍경(風磬)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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