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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y 20. 2024

오늘은 짜장면 먹는 날

 74년된 짜장면집 _ 경화춘


어떤 식당이 몇십 년 되었다고 하면 자칫, 그 세월만큼 맛이 업그레이드되어서 같은 종류의 음식으론 그 어느 곳보다도 우월한 맛일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노포란 맛보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꾸준하고 근면하게 가게를 유지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물론 오랜 세월 지속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맛에서도 어느 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겠지만 노포는 맛의 개념을 넘어서 음식이나 분위기에 얽힌 누군가, 혹은 한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게는 몇십 년이 되었지만 오히려 '나이를 먹지 않는 맛'을 경험하는 게 노포의 매력일 것이다.


공식적인 여행 기간이 이틀 남았을 때, '경화춘'으로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경화춘 김해 최초의 중식집으로 앞서 소개한 '만리향'처럼 '글로벌 푸드 타운' 안에 있고, '한우물 가게'와 '백 년 가게'의 목록에 올라있는 식당이다. 1950년 대만 화교 곡소득씨가 동상동에서 시작해서 2대째 경영하고 있다니 올해로 74년이 되는 그야말로 노포다. 오랜 전통의 맛 덕분에 여전히 김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집이라고 한다.


김해에 70년이 넘은 짜장면 집이 있다는 안내책자를 보면서 처음으로 짜장면을 먹었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지만 기억은 뒤섞여서 딱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주말이나 이삿날에 집에서 배달을 시켜 먹기 전부터 특별한 날에는 대개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었고, 짜장면 먹는 날은 즐거운 일이 있는 날이었다.



경화춘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 가운데에 턱 버티고 있는 키 큰 선풍기마저 묘하게 예스럽고 희화적으로 보였다. 왜 나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짜장면의 표기법이 '자장면'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터무니없이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더불어 짜장면을 앞에 둔 추억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 년 후에 국민 정서에 부합, 어쩌고 하면서 두 표기법 모두 표준어로 삼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 도루'묵'이 아니라선지, 혹은 선조 임금보다도 권위가 더 높다고 생각해선지, 다시 짜장면이라 하기엔 그 변덕스러운 자존심이 상했는지, 두 개 모두 맞는 표현이란 또 뭐란 말인가. 제발 영양가도 없는 한글 맞춤법 개정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그 무렵엔 직장을 다니면서도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한국어 학교에서 수업을 하던 때라 더욱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짜장면이라고 가르쳐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성인이 되었지만 서너 살 때 이민온 우리 집 아이들은 짜장면보다 짜파게티를 먼저 알았다. 짜장면이 어떤 맛인지도 모른 채 짜파게티를 먹으면서 '세상에 이런 맛이!' 정도의 기쁨을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괜히 미안하기도 했다. 놓쳐버린 한국의 많은 것들 중에 짜장면도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춘장을 사다가 두어 번 집에서 만들어 준 적도 있지만 드디어 밴쿠버에도 짜장면 집이 생겨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정 먹고 싶으면 찾아가 먹을만했다. 이상하게도 다른 외식과는 달리 짜장면은 늘 특별한 날이란 기분이 들게 했다. 어쩌면 나 혼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짜장면 먹으러 갈까?" 할 때마다 아이들의 반응은 다른 음식과는 좀 달랐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게 짜장면이 지닌 마력인 듯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뭔가 부족했다. 그나마 찹쌀반죽으로 잘 튀긴 고기가 푸짐하게 나오는 탕수육 덕분에 그런대로 만족하곤 했다.


한국에 가면, 맛있는 짜장면부터 먹으리라. 작성하지도 않은 '먹고 싶은 음식'리스트의 첫 번째 항목이던 짜장면을 계속 먹지 못한 채 몇 개월이 흘렀는데 김해에 와서도 이제야 먹으러 왔다. 한 달 동안 이전과는 좀 다른 식생활을 해선지 속이 편치 않은 상태라 그리 당기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초'와 '70여 년'의 유혹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 여행의 마지막으로 남겨둔 장소가 한 곳 더 있긴 해도 어디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 한 달 동안의 나 홀로 여행을 잘 끝냈으니 자축하는 의미에서라도 짜장면을 먹고 싶었다. 짜장면은 원래 이런 날 먹는 음식이니까.


깐풍기를 먹으려고 했는데 작은 사이즈가 없어서 탕수욕과 간짜장을 시켰다. 식욕으로 보면 간짜장 하나면 충분했지만 주종목보다 더 당당한 부종목울 빼면 어쩐지 손해 보는 느낌이라 욕심을 냈다. 간짜장을 거의 다 먹어서 탕수육은 두 절미밖에 못 먹었다. 하지만 괜찮다. 가방 안에는 늘 빈 컨테이너가 있고, 식당에서 남긴 음식을 숙소에서 먹으면 끼니도 해결되고 때론 더 맛있기도 하니까.



경화춘의 탕수육은 손님의 기호 같은 건 무시하고 터프하게 '부먹'으로 나온다. 찍먹과 부먹의 논쟁이 생기기 전에 탕수육은 무조건 부먹이었다. 이젠 찍먹이 기본처럼 되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먹을 때면 앞접시에 서너 개를 덜고 소스를 부어서 먹는다. 눅눅한 튀김은 튀김이 아니라고 여길 만큼 바삭한 식감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탕수육은 부먹이다.


탕수육의 맛은 순하고 무던했다. 어쩌면 별 특징은 없는 듯한 이 맛 때문에 지역민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지도 모른다. 특출 나지 않은 대신 물리지도 않을 맛이다. 나 이외에도 혼자 식사를 하시는 분들이 두 분 있었고 나중에 내 맞은편에 한 사람이 더 왔는데 근처에서 일하시는 단골들 같았다. 나처럼 혼자 와서 탕수육까지 시키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단품이었다. 나만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여행자의 티를 내고 있었다. 게다가 인증샷을 위해 음식을 찍는 사람도 나밖에 없어서 마치 얼른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훔친 음식을 찍듯 재빨리 찍고 아무 짓도 안 한 척한다. 여행이 끝나가는데도 음식사진을 찍는 건 여전히 쑥스럽다.



한국에 온 지 5개월 만에 드디어 먹게 된 짜장면, 다소 낯선 달걀프라이까지 있다. 짜장면을 비비는 과정만큼 확실한 애피타이저는 없다. 비비는 동안 침이 고인다. 그리고, 첫 입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맛있다!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 없이 그냥 맛있다. 어쩌면 전국에 이런 맛의 짜장면집은 널리고 널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밴쿠버에서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뭔가 아쉬웠던 맛이 이 한입으로 채워졌다.


너무 오랜만에, 내 몸속 어딘가에 있던 '짜장면의 추억'을 제대로 기억해 낸 기분이다. 내가 어떤 맛을 기대하는지 전혀 몰랐는데 먹으면서 알았다. 배가 좀 불렀지만 꿋꿋하게 거의 다 먹었다. 남은 탕수육을 싸서 넣은 든든한 가방을 메고 나오는데, 식당에서 나올 때마다 습관처럼 하던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에 나도 모르게 진심의 운율이 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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