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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y 17. 2024

꽃무릇 붉은결 산책길

올해는 더욱 아름답길 _ 활천 꽃무릇숲길.


동김해 인터체인지 사거리에서 인제대 방면으로 1,5km 정도 계속되는 녹지가 있다. 이 녹지는 1997년 '어방 공업지구' 조성 때 만들어진 곳으로 인제로와 공업지구 사이에 30여 미터 정도의 폭을 유지하며 길게 놓여 있다.


다양한 수종이 작은 숲을 이루는 이곳은 잘 정비된 산책로와 정자, 벤치, 지압길, 운동기구 등의 편의 시설도 갖추고 있고, 그늘이 적당해서 여름에도 걷기 좋다. 또한 매년 초가을이면 숲길 가득 붉은 꽃무릇이 피는데 지난 25년 동안은 특별한 이름도 없이 도시 계획시설 명칭 그대로인 '어방동 완충녹지'로 표시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22년 3월에 비로소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활천동 주민들의 다양한 제안과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된 최종 이름은 '활천 꽃무릇 숲길'이다.



앞 글(제9화, 여행이 길어지면 일상이 된다.)에서도 잠깐 언급했지 어느 날, 안경점을 다녀오다가 발견한 산책로다. 넓고 분주한 큰 도로의 바로 옆 치고는 나무들이 꽤 많아 보였다. 가로수의 연장인가 싶었는데 나무들 사이고 걷고 있는 사람이 두어 명 보였다. 순간, 눈이 환해진다. 산책로구나!


강릉에 있는 몇 달 동안 매일 아침 바닷가를 산책하던 습관을 멈추니 뭔가 아쉽던 참이었다. 산책로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걷다가 처음 보이는 횡단보도로 길을 건넜다. 숲길로 들어서자마자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큰 도로와 오래된 공업단지 사이에 끼어있는 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길은 예뻤다. 게다가 산책로만으로도 기뻐서 걸음이 가벼워지는 참인데 동색이지만 가장 많은 다른 색깔을 품고 있는 여름초록들 사이로 언뜻언뜻 붉은색이 보였다. 뭐지?



어머, 꽃무릇이네!

놀랍게도 길 양옆이 꽃무릇 군락지였다. 가늘지만 꼿꼿한 연두 줄기들이 입을 야무지게 꼭 다물고 선연할 붉은빛을 익히고 있었다. 숙소까지 걷는 내내 아직은 존재감을 숨긴 연두 대궁은 계속되었고, 안내 플래카드를 보고서 9월 18일에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는 것도 알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축제 때는 경로잔치와 사생대회도 열린다. 하지만 동단위 지역축제라 그런지 김해시에서 준 여러 개의 여행 가이드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은 곳이다. 꽃무릇 숲길에 반해서 나라도 알려야겠다는 시시한 사명감으로 꽃들이 만개할 때까지 날마다 숲길을 지켜보기로 한다.


다음날부터 일어나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이 길을 걸었다. 낯선 여행이 좀 더 일상적이 되자 오히려 여행의 감흥은 새로워졌다. 꽃무릇의 붉은빛은 하루가 다르게 제 영토를 넓혔다. 날마다 산책을 하며 꽃무릇의 안부를 묻는 동안, 태풍(힌남로)이 온 적도 있는데, 태풍이 지나간 후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찾아갔더니 그 험한 비바람도 낭창낭창 잘 달래 돌려보내고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자연은 참 신비롭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꽃무릇(석산)은 '수선화 과' '상사화 '인 알뿌리 식물로 상사화에 속하는 꽃이긴 해도 외양이 명백히 다른데 꽤 많은 사람들이 상사화로 부르는 실수를 한다. 상사화는 백합을 더 닮았고 색깔도 여러 가지인데 비해 꽃무릇은 붉은색 한 가지다. 숲 중간에 꽃무릇과 상사화에 관한 전설과 써놓은 안내판이 있었는데 그걸 읽다가 사소한 궁금증이 생겼다. 꽃과 잎이 나는 시기가 달라 서로 만나지 못하는 건 똑같은데 왜 잎이 먼저인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고 꽃이 먼저인 꽃무릇의 꽃말은 '참사랑'일까?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지 않는 식물의 결정판이 '꽃'이라고 한다면, 언감생신 꽃을 사랑한 잎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이고, 잎을 보지 않고도 절정인 꽃을 먼저 피워주는 마음이 참사랑이란 뜻인가? 쑬데없는 생각의 해찰로 혼자 피식 웃는다.



꽃무릇에 관한 전설은 중국에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라서 생략하고, 영어 이름만 소개하자면 Red spider lily다. 길고 가는 꽃술이 거미의 다리 같아서 붙인 이름 같다. 내가 꽃무릇과 친해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이 꽃술 때문이었는데 그걸 또 이렇게 표현하다니.. 거미에 대한 무섬증이 심각한 아이들이 많은데 이름을 알고 나면 이 꽃이랑 친해지긴 영 힘들겠단 생각도 한다. 너무 포장이 안된 작명 앞에서 문득 떠오르는 다른 꽃 하나,


어릴 때 할머니의 꽃밭에 있던 꽃, 저녁 무렵 혼자 꽃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까맣고 둥근 씨앗을 받기도 하고 꽃으로 만든 귀걸이를 걸고 예쁘지? 하던 동생의 뽀얀 얼굴도 떠오르는 꽃, 분꽃이다. 분꽃의 영어 이름은 four-o'clock. 오후 네시쯤 핀다고 세상 건조한 이름을 꽃에게 주었다. 우리의 옛 어른 들은 분꽃이외에도 '저녁밥 할 때 피는 꽃'이라고도 불렀다는데 흔한 꽃의 작명에서도 생각의 회로나 정서가 다르다는 걸 느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빨간색을 꽤 부담스러워한다. 러시안레드 같은 묵직한 빨간색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꽃무릇처럼 날아갈 듯 밝은 빨간색은 꽃이라 할지라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생김새 또한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글을 만들 목적으로 일주일 동안 날마다 들여다보며 작은 변화까지도 살피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이 가고 눈길 하나 허술하게 줄 수 없었다. 내 변덕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날마다 제 영토를 넓혀가는 꽃무릇을 바라보며 오해와 이해에 대해 생각한다. 오해했다가 이해하게 되고, 이해한다고 믿었는데 그게 오해로 인한 실수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이 여행이 끝나면,  감정의 근육이 그은 명확한 구분선을 한 두 개쯤 얻어서 돌아갈 것 같다.



2017년부터 매년 9월이면 '활천 꽃무릇 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올해는 어제(2022.9.18)였다. 포스팅을 제대로 하려면 행사장에 가봤어야 하는데 분명 사람도 많고 시끄러울 것 같아 여러 번 망설이다 포기했다. 내가 전하고 싶은 건 축제가 아니라 꽃무릇 숲길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사실 며칠 전부터 숲길에는 청사초롱이 매달려 있어서 전체 숲길의 1/3 정도 해당하는 구간이 '꽃무릇 축제'가 열리는 곳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속에 꼬마전구가 있는 걸 보니 밤풍경을 위해서 설치한 것 같은데 밤에야 예쁘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많이 거슬렸다. 청사초롱의 크기와 개수를 줄이면 좀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전 구간은 아니라서 산책할 땐 그쪽으로 가진 않는데, 행사구간으로 정한 이유를 알만큼 청사초롱 아래에 유난히 꽃무릇이 많아서 사진을 찍으려고 몇 번 내려갔다. 그런데 자꾸 가다 보니 이것도 또 정이 드는지 (이렇게 정이 헤퍼서야 원.. ) 청사초롱을 단 예쁜 이유를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다. 청사초롱은 전통 혼례를 치를 때 사용했던 것이니 꽃무릇의 전설을 위한 진혼곡 내지는 영혼결혼식 같은 의미인가? 설마 그렇게 깊은 뜻이..? 한 달만 더 머물었다가는 꽃무릇에 관한 소설도 한 편 쓰겠네. ㅎ

              


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대포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나는 관찰일기 쓰는 마음으로 오늘은 얼마나 더 넓게 피었는지 확인하려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다가왔다.(내가 뭘 잘못한 줄 알고 깜짝 놀랐음) 그렇게 서서 찍으면 꽃 사이의 간격이 넓어져서 예쁘게 안 나온다고 꼭 앉아서 찍어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곤 돌아서며 속으론 꽁시랑꽁시랑.. 조금 전에 저~어기 위에서는 앉아서 찍었거든요. 보여드려요? ㅎ 그런데 정말 우습게도 그 이후로 서서 꽃을 찍는 사람을 보면 그분이 했던 말을 해주고 싶었다. 세 번쯤 참았다.



조금 삭막하달 수도 있는 동네 큰 길가에 '활천 꽃무릇 숲길'이 자라고 있다는 게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숨과 쉼이 되는지 이 숲길을 한 번 걸어보면 알게 된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활짝 피었던 꽃들이 조금씩 시들어갈때 나의 여행도 일주일쯤 남았다. 나도 이 꽃들처럼 저 푸른 대궁에서 잎이 나는 걸 보지 못하고 떠났지만 언제 어디서든 꽃무릇을 만나면 이 도시에서의 아침 산책길이 생각날 것이다. 보일락 말락 하던 작은 꽃망울이 저토록 온 숲을 환하게 채우는 과정을 아침마다 관찰할 수 있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니까.


해마다 개체수가 늘어나 점점 더 풍성해질 꽃무릇 숲길을 상상하니 '잘 살게.'라고 인사하며 안심시키는 기특한 친구 한 명 거기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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