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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y 22. 2024

멈춘 시간의 태엽을 감으며

여행의 마침표 _ 이우환, 무한의 언덕


'가야의 거리'는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봉황대공원까지 '해반천''을 따라 이어지는 2.1km의 길로, 금관가야의 발상지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일종의 테마 거리다. 또한 이 길은, 2007년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경상남도 언택트 힐링관광 18선, 김해시 걷기 좋은 길 12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가야의 거리'의 시작점은 국립 김해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신화의 벽'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와있는 수로왕 탄생 설화의 내용을 형상화한 부조가 길게 한 벽을 이룬다. 그리고 '신화의 벽'이 마주보이는 곳에는 마치 주변을 에워싸듯 놓여있는 바위들이 있는데, 수로왕의 탄생을 맞이한 가야 9간(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을 상징한다. 바닥의 문양과 색상도 신화적인 분위기를 거든다.


가야의 거리는 이미 다녀온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 고분군, 봉황동 유적을 지나간다는 것을 걸으면서 알게 되었다. 시간이 넉넉해서 처음부터 동선에 그리 신경쓰지 않고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장소로 가는 여행을 이어왔으니 동선은 상당히 비효율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풍경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고, 처음에 놓쳤던 것을 발견하기도 했으니 내가 원하는 여행을 한 셈이다.  


가야의 거리를 따라 계속 이어지는 해반천은 가야 해상문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천변에는 걷기 좋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가야의 거리는 크게 세 구간으로 나뉘는데 해반천 위에 놓여있는 다리로 구분한다.



가야의 거리 1구간은 연지교에서 경원교까지로 '신화와 탄생'이라는 주제로 꾸며진 580m의 길이다. 신화의 벽, 가락국기비, 역사의 벽, 민속생활 도구 관람로, 시민헌장 비, 춤추는 시계탑, 각배 분수, 유하리 마애불 등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세 구간중에 소소한 볼거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유하리 마애블은 두 개의 바위에 각각 약사여래좌상불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크기도 작고 희미하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알아보았을 때의 반가움이 크다. 표현기법으로 볼 때 고려 후기나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장유면 유하리 34-1번지에 있던 것을 장유 배수지 설치 공사 때문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1구간이 끝나는 곳의 건너편엔 35,992명의 시민 성금으로 제작된 #시민의 종이 있다. 6가야와 가야 토기를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종각의 상부에는 기도하는 손의 형상 및 뿔의 이미지를 나타냈는데 그 손의 형상 안에 있는 6개의 고리와 전체를 받치고 있는 여섯개의 기둥 모두 6가야를 의미한다. 범종은 중요무형문화제 112호인 원강식 주철장이 제작했다.



시민의 종을 보고나서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대성동 고분군의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왔을땐 멀리서만 보고 가지 않았던 쪽이라서 가야의 거리를 살짝 벗어나 대성동 고분군으로 올라간다. 내맘대로 정한 고분군 당산나무를 한 번 더 만난다. 잘있어. 잘 늙어가길 바래. 나혼자 감정에 겨워서 인사하고 내려오니 대성동 고분 박물관 앞이다. 김해에 온 첫날, 택시 기사분이 데려다 주신 곳이다. 전혀 의도한 건 아닌데 시작했던 곳에서 마침표를 찍는 우연도 뭔가 의미있게 느껴진다.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첫 날 그랬던 것처럼 햇살은 여전히 따갑다. 어디서 좀 쉬었다 갈까.. 아니면 시작점에서 끝난 우연을 에피소드 삼아 여기서 끝낼까... 망설이며 길을 건너다 마주친, 선물같은 발견, 이우환의 작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내 앞에 있었다. 얼마를 더 걷든, 무엇을 더 보든, 여행기의 마지막 마침표가 정해진다. 잠깐 앉아서 쉴 곳을 찾는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옆에 쉼터도 있다. 수로황후가 가야로 올때 타고온 배의 모양을 본 뜬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신발까지 벗고 잘 쉬었다.



가야의 거리 2구간은 '경원교'에서 '봉황교'까지 760m로 '예술과 번영'이라는 주제로 조성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마민족 상징 조형물이다. 국보 제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 토기와 가야 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참고로 하여 청동주물로 제작한 '기마민족 상징 조형물'은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의 표현으로 가야인의 용맹하고 웅장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했다. 1구간에서 본 '각배'분수도 물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 지역의 랜드마크 구실을 할 것 같은 '청동칼 분수'도 역시 물은 없었다. 여기서 사거리를 지나면 3구간의 시작이다.



가야의 거리 3구간은 봉황교에서 전하교까지 580m의 길이로 '생활과 문화'라는 테마로 조성된 거리다. 3구간에 들어서면 길 건너에 바로 봉황대 공원이 보인다. 전에 왔던 곳이지만 다시 들어갔는데 여전히 한가롭게 나무 그늘을 즐기는 사람들을 지나다 전에는 보지 못한 감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벌써 익어가는지 감빛이 밝아지고 있다. 감이 많은 강릉에서 3개월이 넘게 있었는데도 때가 맞지 않아서 결국엔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단감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이미 다녀간 곳이라 수련이 있던 작은 연못까지만 갔다가 돌아나온다. 3구간 안에는 복합 문화 예술 공간으로 이 지역의 문화 예술의 중심인 '봉황 예술극장'과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치즈, 피자 체험관, 자전거연습장등이 있다.


봉황예술극장 외벽에 설치되어 있는 '너와 나의 시간들'이라는 변대용 작가의 작품앞에 멈춘다. 오브제로 사용된 시계는 김해에 거주하는 21명에게 새로운 시계를 주고 그들이 사용하던 시계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저 산뜻하고 가벼워보였는데 작품을 위해 사용한 시계들의 내력을 알고나니 생각이 확장된다. 시간을 내서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준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 보다는 나의 '시간'을 내주었다는 데 더 진솔한 의미가 있는 것일수도 있다.


예전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김해에서 한 달 살기'가 내겐 어떤 시간이었나 되짚어본다. 정말 너무나 오랜만에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에게 준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시간'이었다. 내 삶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발견하거나 깨닫는 시간은 아니었을지라도 무르기만 하던 감정의 어느 부분이 조금쯤 단단해졌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다시 이우환,



"여기는 가야의 언덕이다. 눈앞의 작품을 보며 잠깐 발길을 멈춰보자... (중략)... 여기도 어디도 당신도 모두 가야의 언덕이다. 무한의 언덕, 2003년 5월 이우환 "



무한의 언덕 _ 이우환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으로,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던 오후다,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 그저 아득해지는 고요를 만난다. 여행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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