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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y 13. 2024

망칠뻔한 하루

습지, 벽화, 사람 _ 김해관광택시



김해시의 관광 상품 중에 '김해관광택시'라는 것이 있다. 각각 4시간, 8시간 코스가 있는데 자율 여행으로 할 수도 있고, 시에서 짜놓은 여섯 가지 추천 코스 중에서 고를 수도 있다. 비용은 시간당 2만 원이지만 김해시에서 50%를 지원해 준다. 여러 번 망설이다가 한국에서 운전하는 게 자신이 없어서 차를 빌리지 않아 뚜벅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마음과는 달리 외곽에 있는 몇몇 군데는 여행계획에서 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 관광 패키지의 세 번째 코스에 가려고 했던 곳이 세 군데나 있어서 바로 신청을 했다. 더구나 여행자 부담인 요금의 50%는 내 앞으로 할당된 체험비로 대체할 수 있어서 사실상 무료인 셈이었다.



김해시는 '김해관광택시'라는 여행 패키지를 위해서 2022년 초에 택시 기사분들의 신청을 받고 그중에서 다섯 명의 기사분을 뽑았는데 남자 3명, 여자 2명이다. 다섯 명의 기사분들이 순번대로 돌아가며 담당한다는데 나는 정성순 기사님의 차를 타게 되었다. 택시 기사님중에 여자를 본 적이 없어서 뜻밖이었지만 무척 반가웠다.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니 아무래도 같은 여자면 여러모로 좀 더 편한 건 사실이니까


내가 가려던 장소는, 화포천 습지 생태공원, 김해 분청 도자기 박물관,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이다. 기사님은 약속시간에 딱 맞춰서 숙소 앞으로 오셨고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벌써 마음이 편했다. 기사님은 김해의 구석구석을 잘 아셔서 가끔 여행 가이드처럼 책자에는 없는 정보도 주시고, 무엇보다도 두런두런 말씀하시면서도 운전을 어찌나 안전하고 편하게 하시는지 그동안 꽤 거칠었던 버스나 택시 운전에 다소 불편했던 심신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차에서 기다리시는 게 아니라 내가 돌아다니는 동안 나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셔서 우두커니 차 안에서 나를 기다리시면 신경 쓰일 것 같았던 소심증도 덜었다. 무엇보다 대화가 거슬리거나 어색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렇게 모든 것이 내 편인 것 같을때의 가뿐한 마음으로 첫 목적지인 화포천 습지 생태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화포천습지생태공원은, 국내 최대 규모의 하천형 습지로 현재 이곳에는 다수의 멸종 위기의 동물들을 포함한 총 812종의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2017년에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여기는 기사님이 잘 아시는 동네고 자주 산책을 하시는 곳이라며 도로변인 입구 쪽이 아니라 더 돌아가서 좀 더 깊숙한 곳에 차를 대셨다. 실제로 봄에 찍으신 푸릇푸릇 한 사진도 보여주시면서 지금은 시기가 별로 안 좋다고 걱정을 하신다. 내 불찰이다. 그러니까 겨울이나 봄에 와야 하는 곳을 늦여름 땡볕에, 그것도 태풍과 폭우가 지나간 직후에 와서 흙탕물이 말라붙은 풀과 나뭇잎은 마치 시든 것처럼 보였고, 800여 종의 생물이 산다는데 나는 뜨거운 햇볕 아래로 휙 날아가는 흰 새를 한 마리 보았을 뿐이다. 계절만 잘 맞았더라면 정말 멋있는 곳이었을 텐데 아쉬웠다. 하지만,




은밀한 수로를 품고 있는 습지와 밀푀유 같은 표정의 구름과 푸른 하늘 덕분에 어쩌면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풍경을 만난 것일 수도 있다.


#진영역철도박물관이 두 번째 행선지였다.

1905년 군용 철도로 개통되어 2010년 폐선되기까지 100여 년 이상을 진영의 교통 중심지였던 진영역을 철도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다. 기사님도 마산으로 학교를 다니실 때 이 진영역에서 기차를 타셨다며 감회가 새롭다 하셨다. 시민들이 기증한 철도와 관련된 각종 추억의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는 리플릿을 읽었지만 직접 확인을 하진 못했다. 휴관이었다.



우리는 둘이 나란히 서서 닫힌 문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두 손으로 빛을 가려 시선을 모으며 안을 훔쳐보았다. 문득, 아주 어릴 때 한 번쯤 했던 놀이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안에 있는 물건들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괜히 즐거웠다. 기사님은 나를 위로하시느라, 쬐깐하고 별거 없지예~ 하신다.


분명 월요일이 휴관인데 화요일에 문을 닫은 이유가 추석 연휴의 여파인가 싶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오늘 일정의 메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을 검색했더니 다행히 '영업 중'이라고 나온다. 진영역 밖에 세워져 있는, 이제는 달리지 못하는 기차와 철도에게 다정한 눈인사를 하고, 진영역은 기사님의 추억담 덕분에 가까스로 기사회생했다는 농담을 하며 차에 올랐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세 번째 코스인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입구에 도착했다. 매표소가 보였는데 뭔가 분위기가 쎄~했다. 결코 낮게 내려앉은 구름 때문만은 아니란 걸 금세 알아챈다. 하지만 이 불길한 예감을 애써 모른척하며 매표소로 갔다. 지금까지 다녔던 박물관은 모두 무료였는데 이곳은 성인 입장료 2,000원이다. 미술관 문이 닫혔다는 말을 '매진'이라는 단어로 대신하고 있었다. 또?



인터넷을 다시 찾아봐도 문을 열었다고 나온다. 아마 추석 연휴 때문인 것 같았다. 정기적인 스케줄 이외의 휴관이나 개관을 하는 날을 인터넷에도 올려주면 좋을 텐데 어쩌다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나 보다. 혹시라도 여행 중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개관 여부를 알고 싶으신 분은 인터넷 정보를 믿지 말고 직접 전화를 해 보시길 권한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미술관 본관인 '돔 하우스'로 갔더니 추석날만 휴관하고 그다음 이틀 동안은 개관, 그리고 오늘이 휴관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나는 딴에는 머리 쓴다고 연휴 동안은 휴관일 것 같아서 연휴가 끝나고 왔는데... 짐작건대, 이제는 명절 연휴 동안 식구들끼리 집에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연휴의 개념으로 여행을 다니니까 미술관도 그때가 덩달아 대목인가 싶었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지만 예상대로 바로 옆에 있는 '분청도자기박물관'도 휴관이다. 사실 오늘 일정은 이 두 곳을 가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루를 완전히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계획이 어긋나니까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지리를 모르니 소요시간도 몰라 어디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기도 애매했다. 아직 세 시간이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라 황당한 나를 눈치채셨는지, 덩달아 잠깐 고민하시던 기사님이, 그래도 이왕 온 김에 일단 주변을 좀 둘러보자 하셨다. 별 기대나 의욕도 없이 주차장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도예촌 거리'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도예촌 거리 _ 진례 도자테마 거리

벽화를 좋아하면서도 놓쳤던 곳이다. 관광 가이드북에도 입구의 이정표 사진 한 장과 주소만 나오고 별 설명이 없어서 눈여겨보지 않은 탓이다. 미리 보았던 '회현동 벽화'로 여행의 구색(?)은 맞췄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트릭 아트'로 그려진 물고기 한 마리가 마치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앞장선다. 물이 없는데도 마치 발목이 드러나게 바지를 걷고 찰방찰방 물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엉망이 된 오늘 하루의 계획을 보상해 줄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대 덕분이었다.


골목이 여러 갈래다 보니 기사님과는 자연스레 헤어져서 각자 돌아다니다가 다시 우연히 만나면 각자 본 것에 대해 얘기하다가 또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마 혹시라도 내게 방해가 될까 봐 배려하신 것 같다. 진례도자테마거리는 화포천에서 더위에 지치고, 가는곳마다 허탕을 쳤던 순간을 보상받기 충분할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중간에 만난 들꽃과 어느 댁의 포도나무, 그리고 수십 년 만에 본 석류나무도 정다워서 마치 벽화의 연장 같았다. 밥 짓는 냄새를 맡고 자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옛 어머니들이 가까이 두고 아꼈던 석류나무는 금세 그리운 외할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진례 도자 테마거리(도예촌 거리)는, 조선 후기의 화가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를 재현하고, 도자 마을 주민들의 일상 이야기를 담은 #고전벽화거리, 가장 긴 벽화거리로 진례면 도예촌 24개 공방에서 참여해 총 400여 개의 작품으로 꾸민 대형 벽화와 도자기 만드는 과정 벽화, 트릭아트 기법의 포토존으로 구성된 #타일벽화거리, 향기 좋은 꽃에 나비가 따라오듯 도자 마을에도 많은 방문객이 찾아오길 바라는 주민들의 마음을 나타낸 #향기벽화거리, 청곡 저수지를 주제로 자연숲 폭포수와 징검다리, 하늘을 나는 학 등을 표현해 자연이 아름다운 도자 마을의 풍경을 나타낸 #자연벽화거리로 나뉘어 있다. 벽화가 워낙 많아서 최소한으로 줄였는데도 사진을 많이 올릴 수밖에 없어서 첫 벽화 외에는 설명 없이 올린다.



진례면 도예촌에 있는 24개 공방에서 참여해 만든 총 400여 개의 타일작품들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어울려서 빈 벽을 꾸미고 있다. 타일마다 그려진 각각 다른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림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잘 어울려서 특히 마음에 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였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도예촌의 벽화골목(진례도자테마거리)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와도 다정하게 걸을 수 있고, 조곤조곤 함께 나눌 이야기들이 저절로 떠오르는 산책로 같았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고 즐겼으면 좋겠다.



도예촌 거리의 골목골목 벽화들을 다 둘러보고 '클레어아크 김해박물관'쪽으로 다시 나오는데 왼쪽 저 멀리에서 자꾸 눈길을 잡는 것이 있었다. 외관이 미술관과 깔맞춤인걸 보니 부속건물 같다. 그 주변에 뭔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이미 많은 걸은 탓에 다리가 피곤해서 망설이는데 마침 미술관 입구 옆에 있는 카페가 보였다. 기사님께 커피 한 잔 사드리고 싶어서 가자고 했더니 그럼 잠깐 쉬고 나서 저 위로 올라가 보자고 하신다.


#FALL IN COFFEE, 미술관 카페테리아의 이름이다. 커피는 늘 따뜻한 아메리카노인데 배가 좀 고파서 라테를 먹긴 했지만 커피 향도 좋고, 조그맣게 구운 오트밀 쿠키도 맛있었다.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고맙다는 말을 서너 번씩은 한 것 같다. 나는 예상밖의 상황에서도 이렇게 편하게 친구 해주셔서 고마웠고, 기사님은 일하면서도 친구와 여행하는 기분이고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고맙다고 하셨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평소에 잘 내놓지 않던 개인사까지도 별일 아닌 듯 주고받게 되었다. 문득, 자신이 가진 아픔이나 비밀을 털어놓기 가장 좋은 사람은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타인이라던 글이 떠올랐다.


그런데 커피와 오트밀 쿠키 값을 기사님이 내셨다. 그럴 수는 없다고 극구 말렸는데 내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사이에 '제로 페이'인가 뭔가 하는 속전속결 결재 방법을 쓰셔서 어이없게도 얻어먹고 말았다. 여행 중이니 돈을 많이 쓸 테고, 당신은 지금 돈도 벌고 구경도 하니까 커피는 내가 사야 한다는 큰언니 같은 말씀을 덧붙이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택시 기사님한테 커피 얻어먹는 손님이 어디 있나요? ^^)


일주일 전부터 세웠던 계획인데 어쩌면 이렇게 처음부터 어긋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난다. 하지만 영락없이 망칠 수도 있는 하루였는데 그 어긋남에서 시작된 의외의 것들로 예상치 못한 것들을 느끼고, 기사님 덕분에 자주 웃고 느긋하게 쉬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스스로 시작한 여행이지만 일정이 길어지다 보니 생활이기도 해서 낯선 곳에서 혼자 지내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이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 여행에서 가져온 기념품을 볼때처럼 미소로 떠올릴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친절하고 성실한 한 사람의 수고야말로 가장 소중한 관광자원이란 생각이 든다.



마치 로렐라이 언덕의 '싸일렌'처럼, 휴관인 미술관을 떠나지 못하게 우리를 잡아끌었던 '클레이아크 타워'는 멀리서도 잘 보여서 미술관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저 계단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옥상정원이 있다. 미술관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외벽의 아름다움과 주변의 볼 것들만으로도 충만했던 기억을 모아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건물과 옥상의 조각정원은 다음 글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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