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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n 24. 2024

길 위에서의 하루

오카나간 벨리 Okanagan Valley_ 로드 트립


프롤로그_ 풍경여행


팔은 안으로 굽어야 정상이니까 '나는 캐나다가 참 좋아' 하다가도, 솔직히  맑은 공기를 빼면 별로 볼 것도 없는 나라라고 무심한 듯 툭, 말하기도 합니다.


역사가 짧으니 유서 깊은 장소나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시 자체가 세련되거나 독특하게 아름다운 것도 아닌 데다 사람들의 패션도 검소하다 못해 지루합니다. 패션 테러리스트 도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운동복이나 요가복이 흔한 일상복이고, 우리끼리도 블루진으로 한 벌 입은 걸 '캐너디언 턱시도'라고 농담을 합니다. 게다가 하다못해 내세울만한 특별한 음식도 없어요. 기껏해야 푸틴(감자튀김에 치즈와 그레이비소스를 왕창 얹어서 먹는), 연어나 랍스터 요리, 아이스 와인 정도거든요 사실 이건 요리라기보다 요리 재료에 더 가깝죠.


그리고 거의 모든 시스템이 느려서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기다릴 줄만 알면 언젠가 되기는 해요. 가장 논란이 되는 의료혜택, 공짜면 뭐 하냐고 기다리다 지레 죽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도 진짜 위급하다고 판단되면 순서를 무시하는 예외는 있습니다. 제가 그런 혜택을 받은 적이 있어선지 저는 별 불만은 없어요. 기다리는 동안 잘 관리하면 자연치유가 되는 경우도 분명 있고, 최소한 돈이 없다고 병원에서 수술을 거부해서 죽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래저래 좀 불편하고 억울할 때는 있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정말 저는 다 괜찮아요.


왜냐하면 숲과 맑은 공기를 빼면 별 볼일 없다는 말은 사실 불평이 아니라 자랑이며 제겐 무척 중요한 삶의 요소 중 하나거든요. 대놓고 자랑하면 부러워서 속상한 사람들이 있을까 봐 괜히 이렇게 돌려서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사는 BC(British Columbia) 주를 포함한 캐나다 여행은 거의가 로드 트립에 가깝습니다. 보고 느낄 게 나무나무나무나무숲숲숲과 뜻밖의 야생동물, 그리고 맑은 공기밖에 없고, 이것들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캐네디언 로키쪽으로 가면 웅장하고 광활한 자연이란 표현이 저절로 떠오르죠. 이런 풍경 앞에 서면, 주눅 든 줄 알았던 시시한 내 삶이 어느새 겸손과 감사로 치환됩니다. 자연 앞에서 예외의 인간은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아직 자연의 치유력을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죠. 자연은 언제나 인간은 줄 수 없는 위로를 품고 있다가 아낌없이, 너그럽게 내어줍니다.


이른 아침 익숙한 산책로를 걸을 때나, 내 집 창가에서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고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볼 때나,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의 풍경에 감탄하며 시선을 모을 때나, 어쩌면 저는 늘 여행 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멀고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그리 탐나지 않았으려나요?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아마 저는 여행의 즐거움을 ‘장소’보다는 여행을 가고 싶은 ‘심리’적 이유에 더 비중을 두는 편인가 봅니다. 익숙하지만 늘 새로운 자연의 풍경에 마음을 얹고, 순하게 침잠하며 나만의 표현을 찾아내 글로 엮는 것도 일상적 여행이 될수 있다면, 저는. 이걸 풍경여행이라 부를까 해요.



오카나간 밸리 Okanagan Valley



하루 이상 집을 비우는 여행은 막연하게 떠나자는 결심을 할 때는 한껏 부푼 마음이지만 정작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면 이런저런 방해요소들이 등장하고 축소되기 일쑤입니다. 더구나 가족 모두가 함께 떠나는 여행은 더 그렇지요. 각자의 일정을 조절해야 하고,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하니 신경 쓰이는 일도 많습니다.


이민생활 딱 10년째였는데 그야말로 먹고살기 바빠서 아직 로키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올해엔 꼭 가리라 마음먹고 어찌어찌 남편의 미술학원과 제가 하는 가게의 휴가 날짜를 맞췄는데 막상 먼 길을 떠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더 피곤하고 막막해집니다. 제가 8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술재료를 팔고 액자를 만드는 작은 가게를 낸 지 사 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그동안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거든요.


이렇게 속으로 날마다 여행이란 단어를 이마에 붙이고 부침개 놀이를 하다가 결국 로키는 포기하고, 올해의 휴가는 가까운 곳을 당일치기로 여러 번 다녀오는 쪽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일 년 후에도 로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니 내년 여름휴가 때 가지 뭐.


그래서 당일치기 첫 여행지는 오카나간 벨리 Okanagan Valley입니다.



도시를 빠져나가기 전의 어느 교차로에서 만난 우리 앞에 서있던 낡은 트레일러. 번호판 위에 붙여 놓은 글귀 덕분에 모두들 와르르 웃으며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한껏 맛보며 즐거운 수다가 이어집니다.


RETIRED!

NO worry ,NO hurry, NO phone, NO boss


은퇴한 후 느긋하게 여행을 다니시나 봐. 부럽다~! 허름한 트레일러는 호사스러운 여행길이 아님을 말해주지만 온 힘을 쥐어짜며 일하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이 부럽고야 맙니다. 사실 캠핑카로 하는 여행 자체는 그리 부럽지 않은데 저 양반은 지금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고 있으리란 상상으로 그저 부러운 것이지요.


걱정도 없고, 서두를 일도 없고,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고, 빌어먹을 상사도 없는 삶이라니!


하지만 이때는 몰랐습니다. 은퇴 후의 삶이 다 좋기만 한 것도 아니란 것을 말이에요. 인생은 대부분 무엇인가와의 거래죠. 은퇴를 했다는 건, 그만큼의 내 시간을 내어주어서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고 은퇴했다고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제 경우처럼 은퇴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적지 않은 고정수입을 포기할 만큼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스스로 직장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욕심을 내려놓으면 삶은 조금 다른 형태로나마 그런대로 이어집니다. 단지 얻을 것과 잃을 것 중에 어느 쪽에 더 의미를 두냐에 달린 것이겠죠.



사실 오카나간 벨리 Okanagan Valley는 처음에 가려고 했던 '케네디언 로키'로 갈때 통과해야 하는 곳이기도 해서 무리해서라도 그냥 로키로 갈 걸 그랬나.. 조금 후회도 되었지만 같은 방향이어도 로키의 관문인 자스퍼나 밴프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 하니 욕심부리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오카나간은 맛있는 사과와 복숭아, 체리 등의 과일이 나는 과수원과 포도농장을 낀 와이너리가 많은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난 과일은 늘 믿고 먹지만(이 글 쓰면서 올해 첫 체리를 먹고 있어요. 맛있네요. ^^) 와인은 제 취향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꽤 인기있는 와인이고, 캐나다에서 최초로 아이스와인(icewine)이 만들어 진 곳으로 가끔 세계 와인 품평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합니다.


아이스와인은 일부러 수확을 하지 않고 겨울을 나게 한 포도로 만드는 와인인데 이때 수분은 얼고 포도의 당분은 얼지 않아서 당도가 높아지고 독특한 맛을 낸다고 합니다. 착즙 할 때 수분이 섞이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에 동결상태나 착즙 하는 강도를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고 해요. 이런 예민한 과정을 거치는 데다 양이 많지 않아서 가격이 비싼 편입니다. 서너 번 마신 후론 별로 즐기지 않는 와인이지만 오래전에 선물로 받아서 처음 마셨던 아이스와인은 정말 맛있었어요. 드라이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치명적인 단맛이지만 첫 한모금을 마실 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단맛이 순식간에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오카나간 벨리도 과수원에서 유픽을 하거나 와이너리에 들리는 일정이면 하루로는 빠듯해서 우리는 말 그대로 로드트립, 풍경여행입니다. 길은 생각보다도 훨씬 높은 곳을 향해 나 있어서 귓속이 수십 번은 먹먹했다 터지기를 반복해서 나중엔 약간 아프기도 하고, 마치 손을 뻗으면 구름에 닿을 것 같은 구간도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구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처럼 하늘과 가까이 있는 풍경속을 달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걸 몇 시간이나 계속해도 지루하지 않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바람이 심해서 창문을 열지 못했는데도 답답하단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늘 같은 동선 속을 오가며 갇힌 듯 생활했던 도시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위로받습니다.



드디어 터닝포인트로 정한 켈로나Kelowna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웨스트 뱅크에서 켈로나로 건너가는 다리는 '도개교'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사실은 켈로나에서 돌아볼 박물관을 세 곳이나 정하고 갔는데 하필이면 가는 날이 공휴일인 BC Day라서 폐관은 아니지만 세시까지만 문을 여는데, 중간에 남편의 실수로 기가 막힌 해프닝이 있어서 지체했더니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 15분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게 무슨 박물관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이곳에서 간단하 점심을 먹고 도시를 좀 걸었습니다. 마침 공휴일이라 소소한 행사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저희는 곧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차를 타고도 숨이 찬 느낌이 들만큼 계속 올라왔는데 이런 넓고 안온한 평지를 만나니 풍경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말목장이 많은 지역인데 큰 스프링클러가 뿜어내는 물줄기가 보기만 해도 시원합니다. 문득, 새벽이 참 아름다운 동네일 거란 생각도 합니다.


남편이 시간이 좀 더 걸려도 집으로 갈 때는 다른 길로 가보자며 위쪽으로 더 올라가서 버눈Vernon을 지나 캠룹스Kamloops를 통과해서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조금 더 돌아온 셈이지만 참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올라갈 때와는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들 덕분에 눈이 깊어집니다. 그러다 갑자기, 마치 말려있던 화폭이 갑자기 펼쳐지 듯 열리는 풍경에 모두들 동시에 탄성을 질렀습니다.



물빛이 산과 하늘을 모두 같은 빛깔로 불러들여 경계가 지워집니다. 빙하가 녹은 물이라 로키의 물빛은 에메랄드빛이라더니 여기까지 흘러내려온 모양입니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길에서는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어서 아쉽게 바라보기만 하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얼핏 보기에 캠핑 사이트 같았어요. 호숫가엔 작은 요트들도 정박해 있고... 즐기는 사람들은 더 좋겠지만 이렇게 원경으로 바라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높이 멀리 있어서 전체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요. 달리는 차 안이라 잠깐 보고 사진도 서둘러 찍어야 해서 좀 아쉽긴 했습니다.

.


어둠이 푸르스름하게 내리자 높은 산 위의 걸린 구름이 노을빛으로 발그레해지고,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차들은 모두 집으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오늘 제가 본 풍경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차를 타는 게 무척 지루하고 힘들었을 거예요.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40분, 오늘 총 920km를 달렸습니다. 온전하게 차를 탄 시간만도 8시간쯤 됩니다. 운전을 좋아해서 장거리를 가도 어지간해선 운전대를 넘기지 않는 남편도 꽤 피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년에 차를 혼다의 '릿지라인'으로 바꾸고도 그동안 거의 도시 안에서만 뱅뱅 도느라 사륜구동의 성능을 다 맛보지도 못했는데 오늘 원 없이 확인했겠네요. 시속 140은 예사로 넘기고 조금만 감시를 소홀하면 시속 150~160 사이를 넘나들더니 예상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습니다. 속도를 올릴 때마다 눈치를 주었더니 눈동자가 한쪽으로 쏠려서 저는 가자미 눈이 된 것 같아요.


식구 모두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중간에 캘로나에서 점심을 먹고는 대충 간식으로 때우면서 왔거든요. 다음엔 먹을 것을 좀 더 제대로 챙겨가야 겠단 생각을 합니다. 캐나다는 도시만 벗어나면 자연이 광활한데 주유소를 만나기도 힘들고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은 아예 없어서 늦은 시간이면 더욱 음식을 살 만한 곳이 없습니다. 겨우 '팀호튼' 정도인데 이것도 로드 트립중에 만나면 하이고 감사합니다~ 수준으로 뜸하게 있지요.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주유소는 좀 더 생겼을 수도 있겠네요. 예전에 로키 갈 때는 만일에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통을 차에 싣고 다녔거든요. 길에서 만난 다른 분의 여분의 기름으로 도움받은 적도 있고요.


늦은 저녁으로 먹을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생각하다가 냉동실에 있는 닭국물과 가래떡을 꺼내서 폭폭 끓인 후에 다 같이 둘러앉아 밤참 같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비상식량(?)으론 이만한 게 없어서 늘 냉동실에 여분을 준비해 두는데 그 덕을 톡톡히 봅니다. 뜨겁고 진한 국물에 속이 풀리니 몸이 노곤노곤합니다.


샤워를 하고 익숙한 잠자리에 누우니 단 하루동안의 집 떠남에서도 내 집의 편안함이 새삼스럽습니다. 아마 오늘 밤엔 모두들 단잠을 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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