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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l 15. 2024

세상에 너의 소리만 남았을 때,

아서배스카 폭포 _ 정호승, 폭포 앞에서



여행 내내, 흐린 날이 많고 가끔 비도 내려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쌀쌀하기까지 했는데 며칠만에 맑은 하늘을 만납니다. 밴프로 가기 위해서 쟈스퍼를 막 떠난, 사흘째 아침이었습니다.


당분간은 계속 직진으로 가기만 하면 되어서 운전하는 남편의 옆자리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차는 이미 샛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살펴보니 Althabasca Falls라는 이정표가 보입니다.로드트립이나 마찬가지라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정에는 없던 곳이고, 아직 갈 길이 멀어서 살짝 후회가 될 무렵,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차 문을 열고 첫 발을 내딛기도 전에 벌써 서늘한 기운과 함께 묵직한 물소리가 들립니다.



 

아서배스카 폭포(Althabasca Falls)는 컬럼비아 대빙원에서 시작되어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따라 흐르는 썬웹터 강과 남쪽에서 온 아서배스카 강이 합류하여 다시 30km 정도 흘러가서 만들어진 폭포입니다.



쟈스퍼를 거쳐 에드먼튼까지 흘러가는 폭이 200m가 넘던 강물이 10m 정도의 좁은 협곡을 만나 한꺼번에 쏟아지는 곳이라서 물의 양이나 속도가 엄청났습니다. 귀가 먹먹한 폭포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지웁니다. 바로 옆 사람과의 대화도 어려울 정도로 그야말로 지축을 흔들것 같은 소리 앞에서 불연듯,


마음은 오히려 고요해집니다.


어디를 가든 여전히 끌고 다니는 자잘한 일상의 근심이나 끊임없이 마음을 치근거리는 나만 아는 상념들이 모두 하찮아집니다. 단순하게 응축된 자연의 풍경 앞에서, 내가 쓸데없이 복잡하고, 감정의 낭비가 심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로키 여행에서 만나는 강이나 호수는 대부분 에메랄드, 혹은 터코이즈로 불리는 조금씩 다른 푸른빛이었는데 그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것도 잊고 비로소 내 마음속 파장과 같은 색을 만난 걸 알아챘을 때의 두근거림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물빛 덕분에 풍경은 더욱 진한 기억이 되었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부축하고 위로하는지를 알아가는 것은 늘 경이롭습니다. 그리고, 그때 폭포 앞에서 떠올렸던 도 여전히 생생합니다.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폭포 앞에서 _ 정호승



강물은,

무섭도록 찬란하게 휘몰아치던 격정과 열망의 기억을 물밑으로 가라앉히고 처음 시작했을 때와 같은 뒷모습으로 먼 풍경을 향해 흘러갑니다. 삶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는 진부한 표현이 새로워집니다.


조금전까지, 내 삶에서도 한 번쯤은 저 폭포처럼 뜨겁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고 싶다는 조급하면서도 두근거리던 마음도 어느새 가라앉고 폭포의 물소리만 이명증처럼 남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변함없는 열망과 절정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뜨겁다가도 타들어가기 전에 적당히 식어야 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시간이 있으면 조금 물러나 관조하는 시간도 필요한 건, 새삼스럽지 않은 삶의 혜안입니다.



폭포에서 나와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맘껏 방황하다 돌아온 사람처럼 노곤해서 창밖의 풍경에 기댑니다. 거대한 수직의 힘에 매료되었다가 만나는 수평으로 기울어지는 풍경은 그지없이 안온합니다. 이 여행에서도 내 삶에서도 아직 갈길이 멀다는 게 오히려 안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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