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필드 파크웨이 The Icefield Parkway
아주 오래전 캐네디언 로키는 바다의 밑바닥 이었다고 합니다.
해발 3,000m가 넘는 산들이 800개 이상 연결되어 있고, 그 속에 총 3,000km에 달하는 아름다운 등산로를 갖추고 있는 지금의 모습으로는 믿기 힘든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1888년에 완성된 '밴프 스프링스 호텔(Fairmont banff Springs)'을 건설할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화석에 의해서였습니다.
이 화석은 고생대 데본기부터 중생대 백악기까지 살았다는 해양연체동물인 암모나이트의 화석입니다. 지금도 호텔에 가면 유리상자 안에 보관되어 전시 중인 이 화석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보진 못했고 밴프에서 '설퍼 마운틴Sulphur Mountain'에 올라갔을 때, 보우 강을 끼고 길게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끝에 있는 '밴프 스프링스 호텔'의 외관만 보았습니다.
밴프 스프링스 호텔을 흔히 동화 속의 궁전 같다고 말하는데 제겐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과 함께 만들던 '전저브레드 하우스(Gingerbread house)' 같았습니다. 암모나이트 화석을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을 이 먼 풍경이 대신했습니다. 광활한 자연의 끄트머리에 지어진 인간의 흔적이 다행히 그리 거슬리는 모양새가 아니어서 마치 '스노우 글로브(snow globe)' 안에 들어있는 풍경처럼 환상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캐나다는 한국처럼 하이킹 코스를 인위적으로 정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설퍼 마운틴 꼭대기의 전망대 근처에는 이렇게 길을 만들어 놓아서 저도 능선을 바라보며 끝까지 걷고 다시 전망대로 되돌아왔습니다. 물론 산 정상까지는 곤돌라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까마득한 아래로 하이킹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감탄과 동시에 기계를 사용해서 올라가는 제가 뭔가 반칙을 쓰는 것 같던 터무니없는 마음이 그나마 조금 해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묵묵한 산맥을 바라보는 것은 멀리서 숲으로 이뤄진 산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을 줍니다. 뭔가 숙연해진다고 할까요. 일시적인 감정일망정 사소한 것에 흔들리지 말고 깊고 멀리, 묵묵하게 삶을 쌓아가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로키 여행은 길 위에서의 여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느 여행이든 이동이 필요하고 그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보통의 여행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것이라면, 로키는 이동하는 시간 자체가 여행이고 목적지는 단지 쉴 곳을 제공하는 곳이란 생각이 듭니다. 여름이라서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침엽수라서 화려한 단풍도 없고 아기자기한 볼거리도 없지만 매번 길 위에서, 혹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감탄하게 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자연의 풍경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키로 가는 사람들은 대개 쟈스퍼와 밴프중 한 곳을 로키의 관문으로 선택하는데 저는 쟈스퍼로 들어가서 밴프로 내려왔습니다. 총 300km 정도 되는 이 길 중에서 쟈스퍼에서 밴프의 '레이크 루이스'까지 230km에 달하는 93번 도로를 '아이스필드 파크웨이 'The Icefield Parkway'라고 부릅니다.
이 길은 로키의 등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페나인알프스 산맥의 고봉인 마터호른을 최초로 등정한 '윈퍼'는 이 길이 품고 있는 풍광이 스위스를 50개 정도 한 곳에 모아놓은 것 같다고 감탄했다는 '썰'이 있긴 하지만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건, 압도적인 풍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로키가 품고 있는 기운이 특별하다는 걸 체험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 다양하지 않은 자연색에 익숙해져서 별 긴장감 없던 시야에 갑자기 원색이 뛰어듭니다. 아무리 길이 좋아서 평지처럼 보인다 해도 귀가 먹먹하다 터지기를 반복하는 높은 곳인데 자전거 여행이라뇨. 이 맑은 공기와 바람을 오롯이 온몸으로 다 느낀다는 건, 아무리 선루프까지 다 열었다 해도 차 안에서 느끼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자전거로 달리는 모습이 어찌나 매력적인지 감탄하는 중이란 티를 내고 싶어서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인사합니다. 멋있어요! 가는 도중 행색이 비슷한 사람들을 또 보았습니다. 어쩌면 일행인지도 모르겠어요. 자기 속도대로 즐기며 가다가 약속된 장소에서 만날 거라는 추측으로 잠깐 들었던 잔걱정을 지웁니다. 혼자서 자전거 여행을 하기엔 로키는 너무 광활하거든요.
로키를 달리다 보면 수목한계선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측정을 해서 금을 그은 듯, 빽빽한 침엽수림과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땅의 경계가 선명합니다. 수목한계선을 볼 때면 그 명칭이 가져오는 연상작용 때문인지 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살면서 '한계'라는 말만큼 좌절과 수긍을 동시에 주는 단어도 흔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계획이나 다짐만큼 해내지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여기가 한계인 것 같아서 열패감에 시달린 적도 있었고, 그러다가도 결국엔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쓰디쓴 좌절이 겸손한 수긍과 평안이 되는 경험을 되풀이하면서 결국엔 내가 바라는 내가 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차를 세우고 달려온 길을 뒤돌아보곤 했습니다. 길이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조금 전에 내가 지나온 길도 되돌아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그때마다 마치 내 마음 안쪽의 숨겨진 실금을 메우듯, 무심했던 일상의 부스러기들을 소중하게 그러모으듯, 가만히 서서, 달려온 길을 바라보며, 비로소 풍경의 일부가 되는 상상을 합니다. 어느새 풍경은 삶이 됩니다.
밴프 스프링스 호텔의 건축현장에서 발견되었던 암모나이트 화석, 현재 호텔에서 보관전시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