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삼월 _ Coquitlam River Trail
아침마다 걷는 숲 속 산책길엔 터닝 포인트로 삼은 파란 다리가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꽉 찰 정도로 좁고 긴 다리다. 가끔 다리를 건너다 자전거를 만나면 난간에 바짝 붙어 비켜주지만 때론 멀리서 나를 먼저 본 사람이 다리 입구에 자전거를 세우고 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누가 되었든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마다 다리가 살짝 출렁거린다.
나는 그 다리의 중간쯤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가을이면 연어가 돌아오는 강이다.
거기 서면, 강물이 흘러오는 것과 흘러가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강은 그저 흐를 뿐이지만 다리 위에 서있는 나는, 강의 위쪽을 바라보며 '오는 강물'을 만나고, 뒤돌아서 다른 쪽 난간에 기대어 '가는 강물'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한다.
'오는 강물'이 품고 있는 풍경은, 숲을 이루는 키 큰 나무들이 강 쪽으로 어깨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겨울을 꾹꾹 눌러 담아 은회색으로 빛나는 나무들이 연하디 연한 연두로 물이 오르는 풍경은 손끝이 간지러울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삼월의 가지엔 아직 옅은 졸음이 묻어있다..강물만 여전히 습관처럼 흐른다.
돌아서서 '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부신 햇살은 언제나 '가는 강물' 위로 일제히 뛰어든다. 뛰어내린 햇살은 윤슬이 되고, 그럴 때면 나는, 아직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떠올리고, 그 시간은 덜컥, 뒷모습이 된다. 흔히 말하는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건 어떤 뜻일까. 살아온 날들이 구겨지지 않아 흠없이 팽팽한 사람의 뒷모습일까, 아니면 숱한 상처를 모아 터닝 포인트를 만든 후 미련 없는 척 돌아서는 사람의 것일까. 생각은, 강물에 씻고 또 씻어도 강가의 돌멩이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최선이었다는, 혹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는 희석되지 않는 회한과 후회들.
무엇인가 어긋난 것을 고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말은 너무 냉정하다. 우리의 삶이 어디 그리 단순하고 간결했던가. 필요충분조건은 언제나 함께 와주지 않았다. 함부로 순서를 뒤바꾸며 제멋대로 찾아와 서툰 약속 하나 쥐어주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낸 적이 더 많았다. 어쩌면 터닝 포인트는 허무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나는 유순하게 흘러가지도 못하고 손금처럼 이미 정해진 것들을 데리고 남은 강바닥을 터벅터벅 걸어갈 것만 같아 벌써 뒤꿈치가 아프다. 물길을 바꾸면 내 시간이 바뀌는 것처럼 서둘러 뒤돌아 서서 '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먼 풍경을 더 멀리 밀어낸다.
밀려난 풍경의 틈새로
끝이 뭉툭해진 바람이 스며들고
새순처럼 돋아나는,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아직 시린 강물로 말갛게 낯을 씻던 돌멩이들이
내 한숨의 등을 떠민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
지금은 깊어지기보다
그저 흘러가야 하는 시간이야.
아침을 끝낸 하루는 빠르게 지나갔고
그보다 더 빠르게 낯선 나도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