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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n 27. 2024

말을 아끼게 하던 물빛

모레인 호수Lake Moraine _ Canadian Rockies



캐네디언 로키Canadian Rockies가 품고 있는 많은 호수들이 다 아름답지만 유난히 물빛이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호수가 몇 개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루이스 호수와 가장 진한 터코이즈 turquoise색이 난다는 페이토 호수, 넉넉한 푸른빛의 보우호수, 그리고 가장 맑은 터코이즈 색이라는 모레인 호수입니다. 


여기에 올리는 사진들은 지금 사용하는 셀폰보다도 픽셀이 훨씬 떨어지는 디카로 찍은 것이라 좀 안타깝습니다. 제가 보았던 그 물빛을 제대로 보여드리거나 설명할 수가 없어서요. 다만 사진과 글 속에 담긴 제 마음의 시선을 느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저는 로키 여행 중에 만난 호수들 중에서 모레인 호수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선은 호수의 물빛이 순간, 들뜬 탄성 대신 침묵하게 될 만큼 맑고 깊기도 했지만 단 한 가지만으로 '가장'이란 수식어를 주게 되는 경우는 드물죠. 모레인 호수의 매력은, 호수까지 가는 길, 호수를 품고 있는 주변 풍경, 공기의 밀도, 진공상태 같은 고요 속에서도 감지되는 소리들.. 등이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게다가 잠깐  내렸어요. 물 위로 내리는 빗물은 땅 위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을 불러냅니다. 게다가 로키에서 가장 맑은 터코이즈 물빛 위로 음표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이라니...  하마터면 원스어판어타임 시절의 어느 겨울 저녁, 어두워지는 바다 위로 내리는 함박눈을 함께 바라보던 첫사랑의 기억보다도 가슴이 설렐뻔했습니다.





모레인 호수 Lake Moraine는 해발 1910m에 위치해 있는데 일단 '레이크 루이스 타운'에서 루이스 호수 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돌아서 13km 정도를 가야 합니다.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자란 나무들이 지켜주는 아름다운 길 덕분에 호수에 도착하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기대와 설렘으로 충만합니다. 하지만 이 길은 눈이 내리거나 길이 얼면 위험하기도 해서 10월 초부터 다음 해 늦은 5월까지는 길이 닫힙니다. 그러니 모레인 호수는 일 년 중에 오직 4개월만 볼 수 있는 호수입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라 운이 참 좋았던 거죠. 저는 8월에 갔습니다. 





모레인 호수는 Valley of the Ten Peaks 라 불리는 10개의 산봉우리가 감싸고 있습니다. 사진으론 호숫가에 있는 키 큰 나무들이 마치 낮은 풀처럼 보일정도니 규모를 짐작하시겠죠? 



이 열개의 산봉우리에서 떨어져 내린 바위들이 쌓여서 자연 제방을 이루면서 생긴 호수가 '모레인'입니다. 자연 제방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크고 높습니다. 빌딩을 짓듯 맘먹고 일부러 쌓았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규모와 형태라서 시간의 축적이 만든 자연의 경이로움에 또 감탄합니다. 


제방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들이 바라보는 풍경은 훨씬 넓고 깊으리란 짐작에 욕심이 났지만 여행 마지막 날이라 너무 피곤해서 욕심내지 않습니다. 올라가면 Valley of the Ten Peaks을 제대로 볼 수 있겠지만 저는 이미 호수의 물빛만으로도 흡족했습니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릴 때 호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열개의 봉우리를 거치면서 부유물들은 모두 침전되고 맑은 물만 호수에 도착하기 때문에 다른 호수들보다 침전물이 없어서 물빛이 맑다고 합니다. 근처에 있는 루이스 호수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금세 느낄 수 있습니다. 루이스 호수의 물빛은 약간 우윳빛이 돌거든요. 




모레인의 물빛은 

맑으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깊이가 있습니다.

생각의 끈을 풀어놓고 마주 앉아 

오래도록 바라보면

언제였는지도 모를 시절에 닫아두었던 

내 마음의 불모지에

물빛이 스며

푸석하던 기억이 말랑해집니다.





잠깐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립니다.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마다 흠 없는 감탄사가 됩니다. 햇살이 맑아야 호수의 빛깔을 제대로 볼 수 있다지만 흐리고 비가 온 덕분에 제겐 더 특별한 물빛이었습니다. 가슴 설레는 정적과 고독이란 이런 것이구나, 순한 아름다움 앞에서 말을 아낍니다.



Lake Morain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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