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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치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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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n 27. 2022

어느 사월,

팥칼국수 먹던 날



돌아와 여러 날, 잘 자는 것도 아니고 못 자는 것도 아니고 잘 먹는 것도 아니고 못 먹는 것도 아니게 지냈는데 갑자기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듯 팥 칼국수 생각이 났어. 서울 있는 동안에 신세 진 마천동 친구네 집. 재개발 기다리는 옛 동네와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어서 조금만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정다운 풍경들이 많았지. 붕어빵과 꽃씨를 샀던 재래시장도 있고 내 발목을 보고, 어이구 삐어도 아주 된통 삐었네 하시며 침놓고 피 빼주고 치자가루 꾸덕하게 개어 붙여주시던, 묻지도 않은 당신 놀러 갔다 다리 다친 얘기 해 주신 한의사도 계셨지.


남한산성 올라가는 여러 길목 중 하나라는데 뻥튀기 아저씨가 땅 주인처럼 자리 잡고 있는 시내버스 종점. 그 길 건너 허름한 가게가 하나 있었어. 메뉴는 달랑 두 개, 팥칼국수와 바지락칼국수, 직접 반죽해 썰어 낸 고불고불한 국수가닥이 좀 전에 윙윙 소리 내며 갈린 뜨끈하고 고운 팥 국물에 담겨 식탁위에 놓인 팥칼국수 한 그릇, 밉지도 곱지도 않으면서 끝내 버려지지 않는, 그래서 매번 남겨두고 가는 것들이 떠오르는 맛이었어.


사람 수대로 나온 삭힌 고추는 난생 처음 보는 맛이라, 이렇게 맛있는 걸 더 줄 리가 없다고 우리끼리 소곤거리는데 맘씨 좋으신 아주머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세 개 담아 주시네. 팥 국물로 숟가락 자국 남기며 싹싹, 긁어먹고 나오는데 배추 속처럼 뽀얀 칠을 한 허름한 커피집이 보였어. 어쩐지 정다워 들어갔더니 손님은 한 명도 없고 배추 고갱이처럼 작디작은 웃음을 지닌 여자가 카푸치노를 뽑네. 오후 두 시, 그 시간과 너무 딱 맞는 맛이라서 나는 좀 헤프게 칭찬했나봐. 그녀는 여전히 배추고갱이처럼 작디작게 웃고, 흰 종이 발라진 창틀 아래 다정한 메모지 한 장,


놀라지 마세요. 뻥튀기 아저씨가 내는 소리예요.


까르르 웃다 보니 이 동네 지도쯤 후딱 그릴 것 같아 기분이 좋았지. 떠날 날 겨우 이틀 남겨놓고 일주일 후쯤 다시 올 사람처럼 당당하게 인사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꿈에서 깬 듯, 남한산성 올라가는 등산객의 옷차림이 왜 그리 요란하고 뻑뻑해 보이던지. 좀 전에 의기양양 떠올렸던 동네 지도를 아무래도 잘못 그린 것 같아 자신 없는 금 하나씩 몰래 지우다 타고난 방향치 팔자 다 들켜서 눈물이 핑 돌던걸. 팥칼국수 맛있게 먹었던 어느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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