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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치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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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l 10. 2022

오래도록, 그 소리, 멈추지 않았다.

초당, 허난설헌 생가 안뜰




아이샤, 그녀와 헤어지기 며칠 전 초당에 갔었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호를 딴 마을 이름 초당, 내게는 그들보다 먼저 떠오르는 더운 김 오르는 두부 한 모의 기억이 포실하다. 좁을 길을 따라 들어서니 오래 그립던 소나무 숲이 안겨온다. 등 뒤의 동해에게는 잠시만 기다리라 눈짓하고 성근 송림에 든다. 거기 내 오래된 기억들이, 모진 해풍에도 다 지워지지 못하고 추억의 나이를 먹고 있었다.


그녀가 유난히 눈에 띄게 늙어가는 소나무 앞에 멈춘다. 여기서 가장 잘 생긴 나무였는데 죽어가네. 나는 소나무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몸이 불편해진 그녀를 본다. 그녀의 목소리가 해풍에 흔들린다. 병들고 죽어가는 것도 삶의 일부니까 이 나무도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거야. 나는, 돌아서며 바로 후회할지도 모를 말을 한다. 그녀 몰래 죽어가는 소나무에 손바닥을 댄다. 손금을 따라 고요한 슬픔이 흐른다. 슬픔은 두고 고요를 따라 토담길을 걷는다. 허난설헌의 생가. 오래된 집이 품고 있는 겹겹의 햇살 속에, 떠돌이 바람 같은 나를 맡기고 잠시 말을 아낀다.


내가 묶어 둔 세월 속에서도 훌쩍 커버린 송림

청정한 푸른 대나무와 반가운 오죽(烏竹)

곱게 비질한 흙 마당

오래된 기와집 처마의 반듯한 이마

뜰 안의 매화

그리고,

운 좋게 만난 공손한 차 대접, 

올해 첫 매화차랍니다.

사람들의 발길로 조금씩 닳아져서 

내년부턴 실내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뜻밖의 행운에 손끝은 정갈해지고

모든 것이 너무나 다정해 목이 메인다.


꿈결인지 바람결인지 내가 그저 무엇인가의 한 '결'이 된 것 같은 오후를 딛고 떠나는 길, 선한 토담과 겸손한 햇살에 기댄 오죽이 서로를 불러내는 색감이 어찌나 안온한지 그 곁에 주저앉고 싶었다. 물기 많은 평화로움은 이렇게 사소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얼마나 오래 잊고 살았던 걸까. 


문득, 대숲에 드는 아득한 바람 소리. 

잘 말려진 바람이 반닫이 깊이 넣어 두었던 맑은 옷을 꺼내 내게 입혀 준다.

오래도록, 

움직일 때마다, 

그 소리, 

멈추지 않았다.



2012, 초당 허난설헌 생가 안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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