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오래오래, 함께 가기
바닷가를 산책할 때,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씩 꼭 찍는다. 바다와 멀리 사는,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쓸 때 메모장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그 당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 때가 많다.
아침에 바다 곁을 걷는 이유는, 그 시간만큼이라도 까칠한 현실로부터 내 마음을 분리시켜서 좀 쉬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보기 좋거나 즐거워지는 것들을 찍는다. 그런데 선뜻 사진을 찍지도 않으면서 뭔가 이상해서 매번 시선이 가는 풍경이 있었다. 마치 바다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중에야 원인을 알고 무거운 마음으로 찍었다. 바로 오늘 올리는 사진들이다.
한국에 도착한 후, 바다 곁을 걷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좀 의아한 점이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동해에 와서 예전에 어땠는지 잊었나 싶었다. 왜냐하면, 전에는 바다에 도착해서 모래사장으로 향하다 보면 얼마 걷지 않아서 바로 파도가 모래밭으로 밀려오는 게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참을 걸어가도 먼바다만 보일뿐 모래밭과 파도가 만나는 해변을 볼 수가 없다. 이유는 바다 가까이에 꽤 가파른 모래 언덕이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고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파도가 높아지고 험해져서 파도가 점점 모래를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일부러 깎아지른 것 같은 모래언덕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결국은 우리가 배출하는 공해 때문이다.
캐네디언 록키가 아주 오래전엔 바다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자연이 신비로웠다. 하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연의 부정적인 변화, 더구나 그 현상의 원인 제공자가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면 변화는 일종의 공포가 된다.
이제야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있는데 우선 그의 문체와 글을 끌고 나가는 방식에 반한다. 이런 내용을 이렇게 쓸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발견에 읽는 내내 기분 좋게 긴장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일방통행 같은 주입식이었는지 새삼 깨달을 만큼 다른 시각과 방식으로 우리가 망가뜨린 세계에 대해 콕콕 짚어준다. 감탄하면서도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어떤 부분에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사피엔스는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눈앞의 이익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 아니,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다. 사피엔스의 브레이크는 이미 고장 난 것 같다. 이 불길한 예감 때문에 '사피엔스는 망하려고 기를 쓰는 종'이라던 최재천 교수님의 말씀도 떠오르고, 어린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우선 일상의 사소한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다시 둘러보고 있다.
엊그제는 넷플릭스의 시리즈인 Our Great National Parks를 봤다. 아직 1편밖에 보지 못했지만 모든 면에서 최상의 다큐멘터리다. 이 '최상'에는 내레이션도 포함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내레이터의 목소리가 거슬리면 그 영상을 끝까지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오디오북이 꽤 불편하다. 유투브에서 오디오북을 찾아 들은 적이 있는데 매번 짧은 단편조차도 끝까지 들은 적이 거의 없다. 책을 읽을 때 소리를 내서 읽는 건 아니지만 내 눈과 뇌의 움직임에 따라서 소리와 비슷한 리듬이 생긴다. 당연히 책마다 다르다. 그런데 오디오 북중에서 그게 딱 맞는 책은 없었다. 물론 순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이다.
이 다큐의 내레이터는 바로 '버락 오바마'다. 그가 훌륭한 톤의 목소리와 전달력이 좋은 스피치 능력을 가졌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바마의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했을 때 날마다 찾아와서 먼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를 들었다는 하와이의 '하나우마' 해변에서 다큐멘터리는 시작된다. 그의 어머니는, 당신이 늘 바닷가에 나와 앉아있어서 오바마의 성격이 차분한 거라는 농담을 하셨다고 한다.
1편(a world of wonder)은 우리가 왜 국립공원에 사는 동물과 식물을 보호해야 하는지, 그들이 얼마나 신비하고 멋진 존재인지, 또한 우리가 만들어 낸 공해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위협을 받고 있으며 결국엔 그 위협이 우리에게도 재앙이 될 테니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암시를 아주 착하고 부드럽게 풀어낸다. 그래서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절망적이고 퍽퍽하던 마음이 조금 말랑해졌다.
특히 가봉의 '로망고 국립공원'에서 서핑을 즐기는 하마 덕분에 즐거웠다. 낮동안엔 더위를 피해 담수호에 들어가 있다가 해가 지면 초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바다로 가는 하마는 바로 바다로 돌진해서 수영을 한다. 높은 파도가 올 때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파도를 타며 좋아한다. 수평선의 석양을 바라보며 서핑하듯 파도를 즐기는 몸무게가 3톤이나 되는 하마를 보면서 하마의 즐거움만큼 나도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아름답고 부러웠다.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내 소원 중의 하나를 하마는 아주 열렬히 즐기고 있었다.(이 순간, 동물들은 옷을 입지 않는다는 게 가장 부러웠다.) 대서양 전체에서 수영을 하는 하마를 볼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바로 옆 열대우림에 살면서 해변으로 소금기 밴 풀을 먹으로 오는 버팔로, 덤불 멧돼지, 둥근귀 코끼리.등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방해하지 않는 자연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가 교육받은 지식의 한계를 금세 드러나게 하는 신비로운 일들이 있다.
물론 안타까운 소식도 있다. 호주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에는 지름이 800미터 밖에 안 되는 섬, '레인 아일랜드'가 있는데 전 세계의 '푸른 바다거북'중 90%가 매년 태평양을 가로질러 이 섬을 찾아와서 알을 낳는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 때문에 모래가 뜨거워져서, 온도로 성별이 결정되는 '푸른 바다거북'의 99%가 암컷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해수면이 높아져 알이 묻혀있는 모래밭까지 파도가 밀려와서 부화되기도 전에 망가진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인상적인 동물들이 많이 나온다. 아이들이 어릴 때 보던 교육프로그램에서 '자부마푸'라는 캘릭터였던 여우원숭이(폰데어데켄 시파카)의 놀라운 모습과 나무늘보(애니메이션 영화 '주토피아'에서 관공서에서 일하는 나무늘보는 최고의 캐스팅이다.)에 관한 경이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약품의 25%가 야생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동물이다. 자신의 이익이 없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어떤 이들에겐 이 사실이 우리가 자연과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생물의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는데 좋은 예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지키기 위해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연과 동물에 대한 이타심이라는 말은 얍삽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만큼의 자각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건 자연을 보호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빗나간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이 있다.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정신없이 빠르게 달려가는 사피엔스의 독주보다는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천천히 멀리 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