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찾을 때 쓰는 두 가지 공식
칠월이 시작되면서부터 아침 산책을 거의 가지 못했다. 그동안 좀 지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날씨와 시간이 도와주질 않아서다. 그런데 그동안 바다 곁을 걷는 게 꽤 운동이 되었는지 그만두고 난 후로 몸도 무겁고 무엇보다 해우소가 이름값을 못한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게 집에서 제자리 걷기, 정확히 말하면 책상 앞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넷플릭스와 함께 걷는다.
야외에서 좋아하는 풍경과 함께 걷는 것과는 다르게 지루해서 오래 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넷플릭스 덕분에 할만하다. 물론 몸과 마음의 정화작용을 본다면 바다 곁을 걷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정신은 화면에 가 있고 몸은 또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름 재밌고 할 만하다. 대신 영화든 다큐든 너무 무겁지 않은 것을 골라야 한다. 무엇보다 옷이나 행동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산책을 하다 보면 나보다 훨씬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맨발로 걷는 사람, 앞뒤로 손바닥을 부딪치며 걷는 사람, 모두들 내게로 오라~스타일로 팔을 좌악 벌리고 걷는 사람,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팔을 앞뒤가 아닌 좌우로 흔들며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마치 작두 타는 무당처럼 제자리에서 콩콩 뛰는 사람 등등.. 자신에게 필요한 스트레칭을 하면서 걷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처음엔 좀 놀랍고 우습기도 했는데 요즘엔 마치 도인을 보듯 부럽게 쳐다본다. 사람의 생각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다양하고 큰 차이가 날 수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단지 생각과 성격의 차이 때문에 저렇게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한 나는 그냥 걷는 것 밖에 못한다. 그런데 내 방에서 제자리걸음을 할 때는 남의 눈치 안 보고 팔을 마음껏, 각도 없이 마구 흔들어도 되고 돌리다 아프면 악, 소리를 내도 된다. 걷는 중간중간에 내게 필요한 스트레칭을 몸치 같은 동작으로 할 수도 있다. 처음 맛보는 자유다. 그리고 가끔씩 쳐다보면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소품도 있다. 바로 바다에서 주워온 조가비들이다.
바닷가 모래밭에는 자잘한 조가비들이 가득 깔려있다. 자세히 보면 약간씩 무늬가 다르지만 대개는 같거나 비슷한 조개껍질들이다. 모양이 부서진 것들도 많아서 조가비라기보다 모래밭의 일부로 보일 때도 있다. 처음 바다에 간 날, 부서지지 않은 것들을 몇 개 골라서 집으로 가져왔다. 한국에 오고 처음으로 바다에 간 날을 혼자 그렇게 기념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좀 아쉽긴 했다. 바다에 오고 조가비들을 보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게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혼자 여러 날 바다에 머무는 동안, 각각 다른 종류의 조개들을 발견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인생에 비유해서 글을 썼다. 꽤 오래전에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좀 부러웠나 보다. 안정된 환경이나 적당한 자극이 있다면 좋은 글을 쓸 수도 있다는 핑계성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송림을 걷다가 바다를 좀 더 가까이에서 찍고 싶어서 모래밭 쪽으로 갔었다. 송림이 막 끝나고 모래밭이 시작되려는 그 지점에서 큰 소라 껍데기 두 개를 발견했다.(사실은 정확한 이름도 모르지만 보자마자 처음으로 떠오른 이름이 '소라'였다.) 마치 심마니가 된 기분이었다. 아마 일행이 있었으면 환호를 했을지도 모른다. 모양도 너무나 완벽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집에 가져갈 생각을 하니 신이 났지만 원래 뭘 들거나 주머니에 넣고 걷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조금 망설이다가 한 소나무 아래에 놓았다. 나름 숨겨둔 것이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별로 없고 아침에 산책하는 사람들은 이쪽으로는 잘 오지 않으니까 어디에 숨겼는지 장소를 기억해 두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디에 숨겼는지 잘 기억하기만 한다면.
내가 정해놓은 터닝포인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그 사이 누가 보고 집어갔으면 어쩌지? 그런데 금세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던 표식을 알아챌 수가 없었다. 소나무 한 종류로만 된 숲이니까 나무로 식별한다는 게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런 중에도 특이하게 굽거나 방향이 다른 나무들이 있고 나는 분명 그런 특징이 있는 나무 아래에 둔 것 같은데 아무리 주변을 헤매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손을 탄 거라는 근거 없는 의심 때문에 솔잎으로 가리거나 아예 모래에 묻어두지 못한 것이 후회가 돼서 거의 화가 났다.
그러다 문득 소라 껍데기를 발견하기 전에 바다 사진을 찍었던 게 기억이 났다. 급하게 폰을 확인했다. 사진은 바다만 찍어서 어디쯤인지 알아내긴 힘들었다. 하지만 찍은 시간이 저장되어 있었다. 날마다 같은 길을 걷다 보니 집에서 출발해서 몇 분 정도면 어디쯤 도착한다는 걸 대충 알 수 있다. 주변엔 이런저런 이정표 같은 것들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벤치의 모양이나 위치, 몇 군데 있는 운동 시설, 군부대 건물, 바다 반대쪽 길 건너의 호텔이나 커피집 등등...
집에서 출발한 시간을 기억해 내고 사진을 찍은 시간을 확인하고 소라를 주웠을 것 같은 장소를 가늠해 보니 내가 여태 헤맸던 곳보다 조금 더 아래 같았다. 콩닥거리는 가슴이 스스로 민망해서 누가 보면 보물 찾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걸음은 허둥댔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그런데 찾고 나서도 여전히 내 기억 속의 장소가 더 정확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물건을 찾을 때 쓰는 두 가지 공식인, '아무리 찾아도 없어!'와 '이게 왜 여기 있지?'의 콜라보는 늘 죽이 잘 맞는다, 분명히 여기가 맞다고 확신하며 아무리 찾아도 없다가 다른 곳에서 찾고 나면 이게 왜 여기 있는지 납득할 수 없는, 그러니까 내 기억에선 지워진 장소에 물건이 있는 것이다.
소라 껍데기를 내 기억이 아니라 휴대폰 속의 사진 덕분에 찾고 보니, 어쩌면 인간은 겉으로만 점점 더 똑똑한 것처럼 보일뿐 모든 면에서 점점 더 능력이 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내게 필요한 곳의 전화번호를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새는 누가 불시에 물어보면 내 전화번호도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누군가에 의해 발명된 기계의 사용법을 습득하는 아주 단순한 단계를 거쳤을 뿐인데 그 기계가 갖고 있는 능력이 마치 내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건 아닐까.
이렇게 모든 것을 스스로 저장하고 기억하고 사용하는 수고를 생략하다 보면 우리의 뇌와 행동은 점점 단순 해질 테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공감이나 사고의 능력도 어떤 몇 개의 공식처럼 단순화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아날로그나 레트로를 단지 감성을 위한 소품이나 음식 같은 것에만 집중하는 유행이 아닌, 삶의 방식이나 생각의 방식에도 적용 시기 수 있으면 좋겠다. 모든 것들이 자꾸 더 새롭고 더 편한 쪽으로만 치우친다. 모든 것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균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면서도 그러기 참 힘들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다.
아, 다시 소라껍데기.
한 달 반쯤 지났을까? 비슷한 장소에서 거의 똑같이 생긴 소라를 두 개 또 주웠다. 물론 반가웠지만 처음만큼 놀랍고 기쁘진 않았던 이유는 친구의 말이 떠올라서다. 처음 주운 소라 껍데기를 정신없이 자랑하다가, 근데 조금 의심이 가긴 해. 바다에서 좀 떨어진 모래밭인 데다 근처에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거든... 했을 때 친구는 웃으며 놀렸다. 혹시 누가 까먹고 버린 예쁜 쓰레기를 주워온 거 아냐? 아...
굳이 그런 말을 한 친구를 원망하면서도 이번에도 딱 두 개라는 것도 마음에 걸려서 두 번째 주운 소라 껍데기는 집으로 가져오지 않았다. 마침 맨발로 해변을 한참 걸었던 아침이라 파도가 드나드는 자리에 예쁘게 놓고 사진을 찍은 후 그대로 두고 왔다. 누군가 나처럼 좀 어리바리한, 하지만 바다의 모든 걸 좋아하는 사람이면 마치 신안 앞바다에서 유물이라도 발굴한 것처럼 기뻐할 테고 그런 사람을 못 만났다면 파도가 고향으로 데려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