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키우는 야생화

동해를 떠나며..

by 윤서



아침 바다를 산책하다 야생화를 발견하면 마치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즐겁다. 아마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이라 그럴 것이다. 산책을 오래 하다 보니 바다가 피워내는 야생화도 계절 따라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되어서 어떤 날은 혹시 못 보던 야생화가 있을까 싶어서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지난 오월에 바다 곁을 걷기 시작하면서 처음 만난 야생화가 보랏빛 '갯완두'였다 모래밭에 피는 야생화라기엔 너무 튼튼한 번식력과 선명한 색을 지녀서 놀랐다. 하긴 모래밭을 척박한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기준이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생명이라면 그 땅이 가장 좋은 환경일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가장 적합한 땅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내가 오래도록 뿌리 내리려 애쓴 곳이 바로 내 자리인 것이다. 내게 가장 적합한 곳이다. '앉은자리라 꽃자리'라는 좋은 말을 새삼 떠올렸다.


처음으로 갯완두를 만난 후부터 산책 때마다 일부러 찾아보며 즐거웠는데 산책을 거른 며칠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혹시 누가 일부러 거둬간 게 아닐까 의심까지 했었다. 이름이 '완두'니까 분명 콩이 열릴 테니 그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묘한 상실감마저 느끼며 안타까웠다. 여러 해 만에 그리던 바다를 만나서 바다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에 애착이 강하던 시기였다. 그건 아마 변화를 시도한 내 삶 속에 나타난 모든 낯선 것들에 대한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로 만난 것이 '갯메꽃'이었다. 바다에 피는 갯메꽃뿐 아니라 메꽃은 언제나 아련하다. 칠월이면 늘 만나던 밴쿠버의 흰 메꽃도 떠올랐다. 갯메꽃은 바다와 모래밭과 아주 잘 어울리며 다소 스산해 보이는 작은 모래언덕마저도 조용한 여백으로 보일 만큼 아름답게 피어났다. 볼 때마다, 꾹꾹 눌러두어서 무의식이 된 것 같은 그리움을 떠오르게 하는 묘한 분위기의 꽃이었다. 사랑스러웠다. 나의 바다가 더 할 수 없이 예뻐지고 있었다.


지난 3개월 동안 거의 날마다 바다 곁을 걸었다. 누군가, 목적지 없이 날마다 걸었다고 말하면 나는, 그게 단순한 걷기가 아니란 걸 알아챈다. 정신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은 육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영혼의 문은 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발톱이 빠지도록 바다곁을 걷고, 또 누군가는 길 아닌 곳을 혹은 아름다운 길을 찾아 걷고 또 어떤 이는 죽을 힘을 다해 산에 오른다. 모두 영혼의 문을 열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영혼 안에 갇힌 무엇인가를 꺼내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큰 결정을 내리며 새로운 도착지라고 생각한 곳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걸 깨달았을 땐, 다시 되돌아가면 된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결국은 내 종착지일 것이다.


이제 이틀 후면 이 바다를 떠난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토록 열렬하고 부지런하게, 때론 우직하게 바다를 만나며 보낸 시간은 없었다. 내가 쏟아낸 허물 많은 것들을 삭히느라 지금쯤 나의 바다는 소화불량일 것이다. 미안하고 고맙다. 신기하게도 자연에서 받는 위로는 다시 사람들과 함게 살아갈 힘이 된다. 늘 그랬던 것 같다.


아무래도 오늘이 마지막 산책일 것 같아 좀 더 가까이에서 바다를 보고 싶어서 모래사장으로 내려서다가 못 보던 야생화를 발견했다.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아직 꽃 모양은 알 수 없었다. 아마 8월에 피는 꽃인 것 같았다. 아, 바다는 이렇게 매달 다른 꽃을 피워내며 조용히 계절의 자리를 바꿔 앉히고 있었구나.


어쩌면 나는 영영 이 꽃들이 만개하면 어떤 모습일 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궁금해하거나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도 선명하지 않은 것들을 숨긴채 지속되고 있는 내 삶도 슬그머니 괜찮아진다. 아마 나는 바다로부터, 지금 모르는 것을 여전히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는 평안을 배운 것 같다. 바다에게 또 빚을 지고 떠난다.












keyword
윤서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출간작가 프로필
팔로워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