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이해보다 오해가 편하다

새벽바다

by 윤서


새벽 4시 반쯤 잠이 깼는데 다시 잠들 수가 없다. 한 시간쯤 뒤척거리다 갑자기 잊었던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그야말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랜 습성이란 것은 그것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같은 생각이나 행동을 반복하게 한다. 나는 이제 다음날을 걱정하며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다는 걸 잊었다. 때론 무의식이 의식보다 강하다. 그토록 원하던 백수가 되었는데 저절로 따라올 줄 알았던 소소한 여유와 즐거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냥 좀 늦을 뿐이고, 과도기라는 말도 있다는 걸 기억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같은 길, 같은 풍경인데 어제와는 또 다르다. 불현듯 낯 설다. 물론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는 곳에서 같은 풍경이란 없다. 하지만 미세한 변화가 지속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변화에 나는 안도한다. 오랜만에 만난 여전한 풍경, 여전한 사람이 위로가 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노출된 달라짐 앞에서 놀라며 실망하거나 외로워지기도 한다. 특히 믿었던 사람이나 가족이면 더 그렇다. 하지만 '갑자기'라는 표현은 틀린 것 이기가 쉽다. 그것은 단지 내가 몰랐거나 인정하기 싫어서 모른 척했을 뿐, 모든 것은 서서히 견고하게 변하고 있었고, 그 변화의 압력을 더는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갑자기'라는 변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길게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냥, 그동안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러니 힘든 이해를 하려고 애쓰기보다 내 식의 오해를 해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거린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택적일 수 없는 ‘가족’이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다 가까이, 작은 해안 도로를 건너고 있었는데 송림 사이로 보이는 오른쪽 하늘이 붉다. 평소에 내가 걷는 길과는 반대 방향인 그곳으로 끌리듯 걸어간다. 아침노을이다. 뜻밖에도 낚시하는 사람이 보인다. 자연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이야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자연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하게 잘 어우러져 있는 인간은 풍경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아름답게 만든다. 이걸 알아챈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상한 변화긴 하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먼저 이해하고 양보했던 때에는 '사람 없는 풍경'을 좋아했는데 이제 그것들의 부질없음을 인정하고 오해라 할지라도 내 판단을 먼저 믿기로 했더니 오히려 인간이란 존재가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더 깨닫는 것 같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감탄이 내게 무해한 사람들의 부피를 늘린다. 씁쓸하지만 나쁘진 않다.


회색 하늘을 지우며 넓게 번지는 아침노을은 안온하다. 만약 내가 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일출을 보게 된다면 오메가 현상 어쩌고 하는 그런 똑 부러진 일출이 아니라 이런 일출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침 해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감은 충만한 그런 일출이다. 새벽 바다는, 떠도는 것들을 데려다 나직하게 속삭이며 제자리에 앉힌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의 느낌은 늘 삶으로 치환된다. 어쩌면 나는 어떤 것들은 막연한 채로 남겨 두는 것이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 혹은 진실은 그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모든 것을 너무 '바람직'하거나 '좋은' 방향으로만 보려 했을 수도 있다. 이젠 무조건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보다 낫다고 말하기가 싫어진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다시 송림으로 든다.

각자 나름대로 휘어졌지만 서로 엉키지 않을 만큼 간격을 유지하며 자라는 소나무들은 다른 종류의 나무들은 만들 수 없는 황홀한 그림자를 만든다. 낡고 익숙한 평안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동해의 송림은 다정하면서도 우아하다. 딱히 만들어진 길이 없어서 모든 땅과 나무 사이가 다 길이다. 나는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청설모처럼 소나무 숲을 쏘다닌다. 불현듯 내 마음이 보인다. 목적지를 미리 알고 도착한 것 같지만 사실은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외롭다. 이런 내게, 서글서글한 품새로 모든 걸 다 드러내는 낮은 송림과 길게 토하는 날숨 같은 파도는, 괜찮다고, 더 좋아지지 않는다 해도 괜찮을 수 있다고 내 등을 쓸어내린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갑자기 좋은 마음이 되면, 그건 그 어떤 구체적인 위로나 보상보다도 의지가 된다. 터무니없는 다짐마저 생긴다. 언젠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뚫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다의 날숨을 내가 들숨으로 마신다. 그리고 다시 바람에게 날숨을 보내면 소나무 숲은 그걸 다시 들숨으로 들이마신다. 오늘은, 이 뭉근한 순환에 마음을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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