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서 Jul 28. 2022

피어(Pier)위를 걷다

풍경에도 성품이 있다


바다 위에 놓여있는 피어(pier)로 가기 위해 철길이 지나가는 해안선을 걷다 보면 멀리, 해변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얀 바위가 보인다. 멀리서만 봐도 다소 볼품없이 크기만 한 이 흰색 바위는 아름다운 주변 경관에 비하면 좀 생뚱맞은 모습이랄 수도 있다. 마치 외계의 어딘가로부터 사고로 툭, 떨어진 것 같은 모양이라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가던 눈길을 저절로 멈칫하게 만든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분명 멈칫, 다음에 이런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어, 저게 뭐지? 하지만 곧 이 도시의 이름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 웃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이름이 바로 White Rock, 하얀 바위다.


BC(British Columbia)주의 한 도시인 'White Rock'이란 이름은 수천 년 전에 이곳 해안가로 떠내려온 이 바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 바위가 다소 희화적이기까지 한 이유는 주변 경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덩그러니' 놓여있어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색깔 때문일 것이다. 조그만 조약돌도 아니고 487톤이나 되는 흰색 바위라니!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어색함이 쉽게 드러난다.

이 화강암 덩어리는 녹아내린 빙하 조각들에 밀려서 이곳까지 왔을 거라고 추측하는데 원래가 흰색은 아니고 바닷새들의 엄청난 배설물 때문에 바위가 희게 보였고, 그래서 눈에 잘 띄는 이 바위가 19세기의 선원들에겐 이정표 노릇을 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한데다 사람들이 자꾸 낙서를 해서 시(市)에서는 낙서도 지우고 white rock이라는 도시 이름과도 어울리게 하기 위해서 매년 흰색으로 덧칠을 한다. 너무나 인위적인 행동이라 우습기도 하고, 바위가 안쓰러울 지경이지만 그래도 이 바위는 아직도 근방에서 살고 있는 세미아무(Semiahmoo)족의 내력이 담긴 전설을 품고있다.


하지만 이곳의 명물은 도시 이름이 된 흰 바위가 아니라 피어(pier)와 노을일 것이다. 바다로부터 1,542피트 정도 높게 놓여있는 피어는 길이가 470미터나 된다. 피어 아래의 교각에는 밀물이 부려놓은 먼바다의 얘기처럼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사람들이 틀을 내려 거둬가도 여전히 번성하는 큰 꽃게들이 살고, 바닷물이 빠지고 난 단단한 갯벌에선 가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승마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도 이 피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받아내면서도 늘 편안하게 맞아주는 안온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면 저절로 알게 된다.


풍경에도 성품이 있다는 것을.


바다를 곁에 두고 기찻길과 나란히 걷다 보니 어느새 피어 입구다. 지금도 가끔 화물열차가 지나간다는 걸 믿기 어려울 만큼 철로가 있는 풍경은 고요하다. 피어에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처럼 자박자박 저녁이 내리는 중이다. 사람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외로울 만큼 멀지도, 방해할 만큼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 걷고 있다. 일행이 여러 명이어도 표나게 시끄러운 사람들은 없다. 나도 그들 속에 내 발소리를 섞으며 걷는다.


피어에는 가로등과 나무 벤치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놓여있다. 피어의 난간에 등을 대고 서서 방금 전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피어로 들어서면서 등 뒤로 두었던 풍경이다. 그 풍경 속에는 고만고만한 작은 가게들이 나란히 한 거리를 이루고 있다. 바로 지척이지만 한 번도 저 거리로 간 적은 없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해변의 산책로 쪽으로 막 올라서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더듬으며 잠시 돌아선 적이 있었다. 문을 열어 둔 어느 재즈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행잉 바스켓의 꽃들이 흐드러진 노천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마치 세상살이에서 만나는 시름은 아예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거리와 사람들이 모두 같은 기류에 흠뻑 젖어있었다. 여름이었고 휴가철이었다.


고단하게 이어지는 일상이라고 해서 음악과 아예 무관하게 산 것도 아닌데 그때 들리던 재즈 연주곡은 마치 닿을 수 없는 곳의 무엇처럼 낯설었다. 마음 맨 밑바닥으로 뭉클, 뜨거운 물이 고이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돌아섰다. 그 소리가,  잊으려고 애써 눌러두었던 것들, 그래서 결국은 내 삶에서 결핍이 되고만 것들을 호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끔 사는 일이 명치 꼭대기로 죄다 올라와 붙은 것처럼 지독한 체증을 느낄 때면, 마치 유일한 내 편에게 고자질을 하듯 이 바닷가로 달려와 피어를 걷거나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때마다 해풍이 축여주는 습기로 까칠해진 일상의 피부를 진정시켰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게 필요한 건 어설픈 충고의 말이 아닌 그것이 지나갈 때까지 함께 기다려주겠다는 모나지 않은 침묵이란 걸 그때 알았다.


구월이 끝날 때쯤, 우기가 시작되면서 노천카페의 테이블이 추억처럼 접혀서 안으로 들여지고, 헤프게 웃던 여름 꽃들이 지칠 때쯤이 되어야 비로소 나는 만만한 마음이 되어 이 바닷가를 걷곤 했다. 재즈 카페의 닫힌 문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빠져나오지 않았고, 나는 피어 위의 한 벤치에 앉아서 머그에 담아온 커피를 마시며 밀물이 되어 돌아오는 바다를 오래 바라보았다.


마치 집 나간 기억을 찾으러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바람처럼 하릴없이 왕복 달리기를 하던 내 그리움도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 빈손이 물리적인 거리가 주는 내가 누릴 수 있는 방관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외로움도 당연한 것이 된다. 한 겹씩 들어오는 물살을 묵묵히 받아내던 갯벌은 어느새 풍만해졌다. 먼 바다 어딘가엔 나를 향해 밀려오는 물살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희망이라 말하기엔 낡고 지친 걸음이지만 그래도 그걸 아예 잊지 않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냐,고 와불(臥佛)처럼 눕는 노을을 일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물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