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저 뒤끝 있습니다.
흔히 세대 간의 마찰을 이야기할 때 부모의 바람대로 살기 싫은 자식들의 입장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쩌면 부모야말로 자식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가 더 힘든 세상인지도 모른다. 세월은 되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나타나고, 배우거나 적응해야 하는 낯선 물건들이 쏟아진다. 그래서 부모의 경험은 점점 더 교육적 가치나 공감을 잃어간다.
청년이 된 아이와 단둘이 한 집에서 산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아이를 통해서 보는 새로운 세상과 가치가 때론 경이롭다. 하지만 한 편으론 꽤 많은 스트레스를 동반하기도 한다. 내가 직장에 다닐 때는 서로 바빠서 주중엔 거의 타인처럼 살다가 토요일이나 되어야 함께 브런치를 만들어 먹으며 그동안 잘 지냈냐는 농담을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이는 아직 재택근무 중이고 나는 주로 집에만 있으니 더 그럴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잘 보내고, 사소한 농담이나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음악이나 미술, 특히 문학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거나 공감하는 부분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이다. 특히 아이는 나에게, 이 세상을 함께 나누는 전부같을 때가 있어서, 이것이 혹시 아이에게 부담이 될까 봐 늘 신경 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유난히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갑자기 뾰족해진다. 불평의 종류와 말투가 딱, 내가 싫어하는 '스파클링 워터'다. 그럴 때마다,
넌 아직도 내가 엄마로(만) 보이니?
라는 공포 영화의 대사 같은 말을 꿀꺽 삼키면서 역모를 꾀하는 내 정체성을 진정시킨다. 그래.. 나도 쉽고 만만한 엄마는 아니지. 엄마란 존재는 단순하고 그저 무조건적 동조를 해야 푸근한 건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똑똑하고 객관적인 사람이잖아...라는 코미디 버전의 자아 성찰로 막을 내린다.
마치 물수제비 뜨기의 명수처럼 아주 작은 돌멩이 같은 한 마디로도 내 마음에 아홉 개쯤의 수제비를 퐁당퐁당 뜰 때는 언제고, 눈치는 빨라서 물 위의 파문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슬쩍 내 방으로 찾아온다. 엄마, 괜찮아?
안 괜찮아!라고 냅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화를 내면 남는 것은 후회뿐이란 걸 문신처럼 가슴에 새기고 사는 나는, 혼신의 연기를 하듯,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응? 왜?라고 반문한다. 이럴 때면 연기엔 전혀 소질이 없는데 억지로 끌려가서 연기 수업받는 심정이다. 그냥.. 엄마가 기분 나쁜 것 같아서...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인성을 실험하는 것도 아닐 테지만 이럴 때마다 표정과 목소리를 관리하기가 정말 힘들다. 나는 화나거나 속상하면 말문부터 닫는 못된 성질이 있지만 대답 안 하면 화났다고 생각하며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고, 대답하자니 나도 감정적 동물인지라 내키지 않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최대의 약점은 내가 '엄마'라는 것이고, 자네의 장점은 나의 '자식'이라는 것이니 마음껏 내 약점을 사용하시게나... 결국 나는 한 인간이기를 빠른 속도로 포기하고 엄마라는 땅에 우당탕탕 랜딩 한다. 그러면 곧 우리 감정의 관제탑에선 무사히 잘 착륙했다는 시그널이 온다. 그깟 타이밍 좀 다른 것 별 일도 아니다. 우리 사이엔.
하지만 타인과의 경우엔 화해의 타이밍이 퍽 중요하고 어렵기도 하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괜찮으니까 너도 이제 괜찮지? 난 벌써 다 잊었는데 뭘 그깟 걸로 꽁해 있냐, 너, 생각보다 뒤끝 있구나? 하지만 이런 말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체한 사람에게 계속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마다 마음의 체증을 해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모두 다르다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화해도 자기 방식대로 막무가내로 하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다툼의 원인이 된 일보다 사람마다 화해의 타이밍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더 싫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믿고 편하니까 그랬다고.(절대로 '만만해서'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미리 장착하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대개 일방통행이 되고 만다.
나는, 복수의 꿍꿍이가 없는 한 뒤끝이 있다는 말, 혹은 뒤끝이 길다는 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할 만큼 마음이 상했는데 금세 그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상대를 무시하는 게 아닐까? 물론 타고난 기질이 한 감정에 오래 머물지 못해서 자신의 무심함을 뒤끝이 없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끝이 없다고 말하는 게 마치 쿨한 덕목 중 하나를 나타내는 것인 양, 자신과는 다른 누군가를 흉보거나 허세를 부리진 말자. 그건 덕목이라기보다는 이기심이나 무례에 가깝다. 음식을 먹고 탈이 난 사람에겐 소화제도 주고, 사람마다 낫는 시간이 다르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왜 감정의 소화불량은 돌보거나 기다리기는커녕 흉처럼 말하는 걸까. 우리 모두, 각각 다른 상태의 신체적 위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심리적인 그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뒤끝이란, 감정의 위장이 소화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 전혀 다른 위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