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법은, 기다리는 것이야.
팬트리를 정리하다가 팥 한 봉지를 발견했다. 음식 재료들을 한꺼번에 많이 사다가 쟁여놓고 쓰는 편이 아닌데도 가끔은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나는 것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아마 장을 보러갔다가 뭔가 팥으로 만든 음식이 먹고 싶어서 사고는 정작 만들려니 귀찮아서 '다음에'라는 칸에 넣고 잊었을 것이다.
큰 볼에 팥을 쏟고 깨끗하게 씻은 후에 그대로 물에 담근다. 마침 부엌 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물 위로 쏟아져서 자그락거리며 씻겨진 팥알들은 구슬처럼 예쁘다. 이렇게 서너 시간 정도 불린 다음에 물을 넉넉하게 붓고 삶기 시작한다. 딱히 지금 당장 무엇을 만들어 먹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지만 팥을 삶아 냉장고에 넣어두면 아마 뭐든 곧 떠오를 것이다. 손질이 많이 가지만 쓰임새가 다양한 식재료들은 언제든 쓸 수 있게 준비만 해 두어도 한 접시의 음식을 완성한 것보다 더 든든하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좋아하는 식재료중의 하나가 팥이다. 그에 비해 마치 만담 콤비처럼 팥을 따라붙는 '콩'은 어릴 땐 거의 먹지 않았다. 특히 송편에 들어있는 콩을 가장 싫어했다. 떡을 좋아해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먹고 싶은데 거기엔 늘 콩이란 복병이 있었다. 그래서 송편을 먹을 때면 마치 슬라이드 필름을 빛에 비추어 보는 것처럼 송편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거나,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슬쩍 갈라 보기도 했다. 이건 들키면 모범생 이미지인 내 평판에 금이 가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떡은 좋고 콩은 싫었기 때문에 물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송편을 살짝 갈랐는데 콩이 보이면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얼른 내려놓는다. 물론 완전범죄를 꿈꾸며 갈라진 쪽을 밑으로 가게 놓는 걸 잊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혼난 기억은 없지만 아마 할머니는 아시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엔 갈라보지 않고도 거의 맞출 수 있었다. 말갛고 뽀얀 예쁜 송편엔 콩이 들었을 확률이 높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콩 맛을 제대로 알아서 밥과 떡은 물론 콩국수까지도 잘 먹고 좋아한다.
만약,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어떤 분기점이 있었다면 그중의 하나가 콩 맛을 알고 콩이 든 음식을 찾아먹기 시작한 때일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아주 사소한 습관을 바꾸면서 저 혼자 어른이 되었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나는 콩과 호박과 가지와 함께 어른이 되었다.
유일하게 팥이 싫었던 기억도 있다. 강원도와 경상도의 전통이 섞인 우리 집에선 생일이면 늘 미역국에 팥밥을 먹었다. 팥을 아무리 좋아해도 국물에 마는 밥 속에 들어있는 팥은 싫었지만, 생일엔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렇게 먹는 줄 알고 불평 없이 먹었다가, 미역국과 팥밥의 조화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걸 먹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고 나서 더 이상 미역국에 팥밥을 말지 않았다. 아니, 말지 못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그 무렵부터, 내 생일에 팥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여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겐 잊힌 음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팥으로 만든 음식이라면 빵이든 밥이든 국수든 죽이든 빙수든 거의 다 좋아하는 편이라서 팥으로 만든 음식만 보면 기분이 좋아서 눈이 저절로 크게 떠지긴 하지만, 편애하는 식탐과는 다른 팥에 대한 기억도 있다. 그리고 그 기억속엔, 아직도 가끔은 그리운 나이 든 여자가 몇 명 있다.
동지에 찹쌀 옹심이가 들어가는 팥죽을 쑤어서 맨 먼저 푼 한 그릇을 담장 바깥에 뿌리시면서, 귀신은 붉은색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잡귀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시던 할머니, 내가 찾아갈 때마다 으깨지 않은 굵은 팥을 듬뿍 넣어 손바닥 반만큼이나 큰 감자떡을 만들어 주시던 외할머니, 매년 날을 정해 직접 팥시루떡을 쪄서 치성을 드리시던 시어머니가 그들이다. 팥은, 흔한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주술적인, 혹은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는 곡물이고, 가족을 위해 팥에게 의지했던 그녀들의 마음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뭉클하다.
팥이 끓기 시작하자 생각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일본 영화 '안경 めがね '에 나오는 '사쿠라' 아줌마다. 영화 속의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한 그릇 먹고 나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는 아주 맛있는 팥빙수를 만든다. 부엌에서 팥빙수에 쓸 팥을 삶는 그녀는 경건하고 겸손한 자세로 팥이 삶아지는 냄비 앞에 서 있다. 말도 하지 않고 누가 말을 걸어도 쉿!이라고 할 뿐 대답도 하지 않고 팥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팥물이 포로록 끓어오를 때 얼른 불을 끈다. 그녀의 기막힌 팥빙수의 맛은 팥을 삶을 때 불을 끄는 타이밍에 있었다. 하지만 그건 타이밍이라기보다는 집중과 정성에서 오는 맛일 거라 여긴다. 그녀는 말한다.
비법은, 기다리는 것이야.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팥을 삶지는 않는다. 나는, 팥이 어느 정도 끓은 후에 불을 낮췄다가 팥물이 잦아들기 시작하면 가끔 뒤적여주면서 익힌다. 그러다 팥물이 거의 다 졸아들고 팥이 포실하게 익은 것 같으면 팥알을 하나 집어 깨물어 보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팥을 삶는다.
내 삶에서 팥 삶기는 이 정도의 정성이나 집중이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러니까, 소중하거나 온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이 사람마다 다르고 그러니, 누군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억울해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화를 내는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도 내가 아니므로.
가만히 불 앞에 서서 팥이 익기를 기다리고, 불을 끌 적당한 시간을 포착하기 위해 집중한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여야만 맛있는 팥을 먹을 수 있다. 팥을 '삶'는 일이나 우리들의 '삶'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